06 축 마흔기념 건강검진

암이라니 내가 암이라니

by AOI BOOKS


마흔을 기념해 건강검진을 받기로 하고 이것저것 검사를 신청했다. 다행히 정기적으로 받아오던 검사들은 모두 괜찮다는 결과를 들었고, 아이 둘을 낳은 뒤 급격히 나빠져 걱정했던 골밀도도 어느새 다시 정상범위로 돌아와 있었다. 건강검진을 받을 때마다 늘 같은 생각을 한다. 살아 있다는 건, 사실 매일이 기적이라는 것.


스스로 숨을 쉬고, 두 발로 걷고, 내 의지로 손을 움직여 음식을 먹는 일. 그 어느 하나도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려 한다. 육아하느라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나의 몸을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간 사이 조금씩 챙기기 시작했다. 불필요하게 붙어 있던 살들도 천천히 걷어냈다. 부족한 체력을 끌어올려 보려고 이래저래 고군분투해 보지만 면역력이 떨어졌는지 이 동네 유행하는 전염병은 죄다 걸려 자꾸만 몸이 아프다. 엄마는 아플 수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씩 몸이 아파오면 온갖 걱정과 두려움이 함께 밀려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만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 힘을 내어 오늘의 밥을 차려낸다. 어른이 되었다고 느껴본 적은 많지 않지만, 이럴 때만은 내가 정말 어른이 된 것 같아 괜히 마음이 이상해진다.







좀더 필요한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오랜만에 큰 대학병원을 찾았다. 일본에 와서 아직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던 시절, 나는 이곳에서 큰 수술을 결심했었고, MRI를 비롯한 몇 차례의 고된 검사 끝에 입원을 하고 치료를 받았다. 막 결혼을 앞두고 있던 그때, 웨딩 업체에서 예비부부를 대상으로 종합 건강검진을 제공하는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받던 간단한 검진과는 달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처음으로 제대로 내 몸을 살펴보는 시간이었다.


다른 검사들은 모두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그러다 목 초음파 검사를 하던 중 나는 처음으로 내 몸에 갑상선이라는 장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평소에 심장이 잘 뛰고 있는지, 췌장이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른 채 살아간다. 초음파 결과, 갑상선에 1센티미터가 넘는 혹이 있다고 했다. 모양이 좋지 않으니 세침검사를 해보자는 말과 함께 나는 그 자리에서 얼떨결에 목에 두꺼운 바늘을 찔러 검사를 받게 되었다.


우리는 곧 결혼을 앞두고 있었고, 멀리 신혼여행도 떠날 예정이었다. 그래서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결혼식과 여행을 모두 마친 뒤 듣고 싶다고 검사를 해주신 선생님께 간곡히 부탁 드리고 그 자리를 나왔다. 그 편이 내 정신건강에도 좋을 것이라 믿었다. 목에 작은 반창고를 붙인 채 나는 그날 밤에도 오랜 친구들을 만나 청첩장을 건네고 깔깔 거리며 마음껏 웃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밤이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고, 간절한 희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결혼식날 아침이었다. 신부대기실에 앉아 차례로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 전화가 걸려왔고 병원이였다. 검사결과가 좋지 않으니 어서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말이 이어졌다. 우리는 한 시간 뒤면 결혼식을 올려야 했고, 곧 신혼여행을 떠날 예정이었다. 그래서 검사받던 날에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다녀와서 자세한 결과를 듣겠다고 그날에 이어 두 차례나 말씀드렸다.


하지만 공감능력이 조금은 부족했던 선생님은 전화기 넘어로 내가 암에 걸렸다고 재차 말해주셨다. 내가 암에 걸렸다니. 결혼식날 아침에 듣기에는 너무 가혹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나는 예정대로 결혼식을 해야 했고 웃어야 했다. 교회에서 진행된 결혼식이어서 였을까, 아니면 신앙의 힘이었을까. 이상하게도 마음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이 또한 지나갈 일이라 생각하니 오히려 차분해졌고 그 순간만큼은 마음이 편안했다.



그 뒤로 우리는 멕시코의 푸른 바다를 보고, 미국에 사는 가족들을 만나며 장장 2주가 넘는 긴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낯선 풍경 속에서 잠시 나의 걱정거리인 암이라는 단어를 내려놓고, 그저 웃고 헤엄치며 막 부부가 된 우리만의 시간을 천천히 보냈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현실은 천천히 눈앞으로 다가왔다. 서울에 있는 큰 대학병원들을 찾아 예약을 했고, 새로운 병원에 갈 때마다 같은 검사를 반복해서 받아야 했다. 결과지를 손에 들고 병원과 병원 사이를 오가며 이리저리 끌려다니듯 하루하루를 보냈다.


한국에서는 보통 갑상선을 완전히 제거하는 전절제 수술을 권한다. 혹시 모를 재발 가능성을 최대한 낮추기 위해서다. 하지만 여러 자료를 찾아보고 공부한 끝에 나는 서울의 한 병원에서 부분 절제로 수술을 진행하는 곳을 찾아냈다. 내 몸속 나비 모양의 장기를 조금이라도 살려보고 싶다는 그 마음 하나로 병원을 찾았다. 당장은 수술 일정이 꽉 차 있어 두세 달 뒤로 수술 날짜를 잡아두었다.


그 사이 우리는 일본에 살 집을 마련해야 했고, 이후 치료를 이어가야 했기에 병원도 미리 알아둘 생각으로 우리가 살고자 했던 도시에 잠시 머물게 되었다. 원래는 집을 살펴본 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이끌림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주변의 모든 이들이 마치 길을 안내하듯 우리를 도와주었다. 우리 부부의 곁에는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갑상선 전문의를 남편으로 둔 분이 있었고, 또 한 분은 가까운 대학병원에서 교수로 근무하고 계셨다. 그럼 온김에 진찰이라도 받아보세요라는 그 한마디로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갑상선 전문의 선생님께 소개장을 받아 대학병원을 찾았고,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일본의 의료 문화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때의 나는 히라가나만 겨우 읽을 수 있을 뿐, 일본어로는 의사소통도조차 쉽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의사와 간호사들은 끝까지 섬세하고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그 친절함과 세심함은 내가 알고 있던 병원의 풍경과는 전혀 달랐고, 그 경험은 지금까지도 내게 적지 않은 충격으로 남아 있다.





의사선생님은 내 갑상선의 모양과 혹의 위치를 마치 설명서처럼 차분하게 그림으로 그려주셨다. 수술 방법과 예상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 그 이후의 치료까지 모든 선택지를 열어 둔 채 조심스럽게 설명해 주셨다. 몇 차례 깊이 있는 진료를 받으며 나는 이상하리만큼 차분해졌고, 그 설명과 태도 앞에서 이곳이라면 믿어도 되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렇게 나는 일본에서 큰 수술을 받기로 결정했다.


한국에서도 갑상선암은 건강검진을 통해 비교적 흔히 발견되는 편이다. 많은 사람들이 전절제 수술을 선택하고, 암 수술임에도 불구하고 수술 후 이틀 만에 퇴원하는 비교적 간단한 수술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서울의 몇몇 대형 병원들은 늘 넘쳐나는 환자와 부족한 인력, 공간 속에서 공장처럼 시스템을 굴려야 하는 현실을 안고있다. 진료실 안의 의사 선생님들은 몹시 피곤해 보였고, 진료는 빠르고 정확했지만 어딘가 기계적으로 느껴졌다. 재발률을 낮추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다 보니, 그 과정에서 환자의 삶이나 감정은 어딘가 뒤로 밀려나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모든 의사가 그렇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진료를 받았던 서울의 몇몇 병원에서는 대체로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 그 중 마지막으로 예약해 두었던 병원의 의사 선생님은 정치적인 일로 한동안 뉴스에 등장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일본에 정착하게 되었고, 수술 이후에도 계속해서 추적 관찰을 받아야 했기에 이곳에서의 선택은 내 삶을 위한 최선의 결정이였다고 생각한다. 수술을 위한 검사를 마치고 드디어 수술날이 정해졌다. 그리고 그날이 왔다.


마취에 잠이 들었고, 눈을 떴을 때 나는 회복실의 하얀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몇 시간은 말 그대로 버텨내야 했던 시간이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통증은 깊었고, 외로움은 생각보다 더 크게 다가왔다. 결국 나는 수면제를 맞고서야 그 시간을 잠으로 보낼 수 있었다. 회복실에서의 시간이 지나 나는 입원실로 옮겨졌고, 수술한 부위의 붓기는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매일 병원에서 나오는 밥을 먹었고, 병원밥이 조금씩 질릴 즈음 남편은 파스타를 만들어 가져다주기도 했다.


간호사들은 늘 차분하고 친절했다. 일본어를 거의 하지 못하던 나를 위해 통역 어플을 함께 들여다보며 말을 건넸고, 매일 반복되는 분주한 일과 속에서도 그들의 태도는 언제나 고요했다. 의사선생님은 수술 부위를 확인하며, 조금 더 지켜보자고 했다. 나는 바다가 보이는 깨끗하게 정돈된 병실에서 일주일 남짓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오롯이 회복에만 집중했다.


수술 이후 체력이 많이 약해졌고, 나는 잘 먹고 쉬는 일을 반복하며 시간을 보냈다. 몸이 조금씩 돌아왔다고 느껴질 즈음, 늦은 나이였지만 임신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조급해 하며 애를 쓸 때는 아무 소식이 없더니, 정말 모르겠다 싶어 마음을 내려놓자 반년 만에 첫째 아이가 찾아와 주었다. 만 서른넷. 아주 늦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노산에 속했던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서른일곱에 둘째까지 출산했다.


그렇게 인생에서 큰 숙제 두개를 마쳤다. 가끔은 오 년만 더 젊었더라면 세 번째 숙제까지 가능했을까 의문이 남지만, 아무래도 그건 목숨을 내놓아야 할 일인 것 같아 조용히 내려놓았다. 나는 지금도 갑상선 초음파를 포함해 매년 정기적인 추적 관찰을 받고 있다. 수술 후 5년이 지나 완치 판정을 받았지만, 호르몬 약은 여전히 매일 챙겨 먹어야 한다.




이제는 건강을 선택이 아니라 전제로 두고 살아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불혹. 미혹되지 않는 나이. 세상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나의 길에 대한 확신을 품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때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도 건강, 둘째도 건강이다. 암이라는 단어 앞에서 멈춰 섰던 그날, 몸과 마음이 동시에 흔들렸지만 오히려 나는 그 순간, 새로운 중심을 찾게 되었다.


혹시라도 육아에 지쳐 나의 몸을 돌볼 시간을 미뤄두고 살아온 엄마들이 있다면, 가끔은 병원에도 가고 내 몸을 조금 더 들여다보고, 조금 더 신경 써 주기를 바란다. 건강하게 곁에 오래 있어 주는 것, 그것이 아이들에게는 결국 가장 좋은 엄마일 테니까. 건강하자 우리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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