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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ylee Aug 31. 2020

어쩌면 나보다 로봇이 낫겠다

일하다 느끼는 감정 기복과 체력의 한계

꼬박 10년 간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다.

보고서 잘 쓰는 사람? 인맥 관리 잘하는 사람? 회의 때 좋은 아이디어를 내 사람?

맞다. 모두 대단하다.


그런데 마음속 깊은 곳부터 존경심이 우러나는 이들이 있다. 바로 '감정조절 잘하는 사람, 기분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직장에서는 수많은 일이 일어난다. 대부분 기쁘지 않은 일이다. 다양한 이해관계가 충돌하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은 물론, 인간의 본성을 마주하게 된다. 일을 만들려는 자와 피하려는 자, 꼬투리 잡고 닦달하는 자와 변명하는 자, 모든 정보를 손에 넣고 싶은 자와 자기가 뭘 모르는지도 모르는 자,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자와 애써 외면하는 자 등등. 하루에도 수십 번씩 충돌한다.

회사 밖은 어떠한가. 우리는 날마다 우여곡절 겪는다. 가족 갈등, 연인과의 다툼, 걸핏하면 아픈 몸, 요즘엔 코로나와 궂은 날씨의 영향으로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짜증과 우울 기본다.  

이런 상황에서, 항상 변함없는 모습으로 업무에 충실히 임하는 사람들이 멋져 보일 수밖에 없다. 나는 기분이 나쁘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오늘은 머리가 아파 더 이상 일하고 싶지 않다며 업무를 내일로 미룰 때가 있다. '차라리 내가 감정과 체력영향을 받지 않는 로봇이었다면, 생산성이 더 높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얼마 전 겪은 일이다.  

9월 중 론칭될 신규 브랜드의 로고 제작이 필요했다.  

사실 모든 대기업은 통일된 브랜드 관리를 위CI 가이드라인이 정해져 있다. 심벌마크, 폰트, 크기, 글자 간격까지 세세하게 정해져 있기에, 브랜드 이름이 결정되면 가이드라인을 따라 만들면 된다. 신규 브랜드 명칭은 사전에 의사결정을 받아두었기에, 디자인팀의 도움을 받아 제작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나) 안녕하세요. 신규 브랜드 로고 제작 요청드리려고 합니다.

(디자이너) 네, 안녕하세요. 인트라넷에서 업무 의뢰서 작성해주시고, 참고 이미지 첨부해주세요.

(나)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디자이너) 아, 그런데 제작은 저희 팀에서 해드리지만, 검수는 따로 받으셔야 해요.

(나) 검수요? 누구한테요?

(디자이너) CI 총괄하는 팀이 있어요.

(나) 아... 몰랐네요. 알겠습니다. 죄송하지만 검수 담당자분을 알 수 있을까요?


친절한 디자이너의 도움으로, 검수 담당자와 연락이 닿았다.

담당자는 상급자에게 보고하기 위한 문서가 필요하다며, 파워포인트 양식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 자기 말고도 검수 담당자가 한 명 더 있다고 한다.


(나) 검수 부서가 또 있다고요?

(검수 담당자 1) 네, 저희 팀은 브랜드명과 디자인 전반을 점검하고요. 다른 팀은 CI 가이드라인 준수 여부를 체크합니다. 역할이 달라요.

(나) 네... 알겠습니다. 제가 이 업무를 처음 해봐서 그러는데, 혹시 또 다른 담당자분은 누구신가요?


그렇게 '디자이너 - 검수 담당자 1 - 검수 담당자 2'와 차례로 통화 후 각 부서 양식에 맞업무 요청을 고 나니, 하루가 지나버렸다. 솔직히 퇴근까지 40분 정도 남았지만, 그 날은 더 이상 일하고 싶지 않았다. 비효율적인 프로세스에 질려버렸다.


이틀 , 검수 담당자 1, 2로부터 피드백이 도착했다. 글자 사이 간격이 맞지 않단다. 나 같은 일반인의 눈으로는 구분할 수 없는 아주 미세한 차이였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디자이너에게 수정을 요청했다. 그는 살짝 귀찮은 듯 '검수 부서에서 고쳐서 주면 되지 또 수정하래요?'라고 다. 나도 그와 같은 생각이었다. '아휴 그러게 말이에요. 번거롭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그날 밤, 카카오 뱅크 x 이마트 26주 적금이 출시 1주 만에 30 만좌를 돌파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출처: https://www.hankyung.com/economy/article/2020082684306)

이렇게 시장에서 호응받는 상품을 출시하기까지 직원들이 얼마나 고생했을까? 두 회사 간 이해관계를 조절하기도 쉽지 않았을 거다.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나도 신규 브랜드의 전략 방향을 고민하고 잘 되도록 매달려야 하는데. 그래도 될까 말까 한 상황에 눈에 보이지도 않는 로고 간격 조정하느라 기운 빼고 있으면 안 되는데.


과도한 프로세스가 문제일까, 이러한 프로세스를 웃어넘기지 못하는 내가 문제일까?

내 힘으로 프로세스를 바꿀 수 없기에, 내 감정을 제어해야 한다. 인공지능 로봇에 내 자리를 뺏기지 않으려면, 로봇의 장점 - 감정에 영향을 받지 않음, 무한한 체력 - 을 닮 수밖에.




*이미지 출처: http://www.engjournal.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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