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냉장고에는 무엇이 들어있나요?
지금 내 냉장고에는 먹다 남은 치즈와 시들어가는 셀러리 그리고 계란, 잼, 소스 같은 게 들어있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마트에 갔던 시절도 있었는데 최근 들어서는 아니 최근이라고 하기엔 조금 지났지만 말이다. 시들어서 무른 야채들을 버리고 유통기한이 지난 재료들을 몇 번 버린 이후로는 어지간하면 신선 제품들은 넣어두지 않는다. 보통 사서 바로 다 먹거나 아니면 같이 사는 친구에게 필요하면 언제든 먹으라고 말해둔다. 식당에서 일을 하면 한 끼는 그곳에서 먹게 되고 좀 배고프면 간단하게라도 뭘 만들어 먹으면 되다 보니 쉬는 날을 제외하고는 집에서 뭔가를 먹을 일이 없어졌다. 일주일에 5일은 일을 하고 가끔 많으면 6일을 일한다. 출근을 하면 오전에 나가서 저녁 마감 때까지 일을 하기 때문에 가게에서 먹는 한 끼가 전부다. 건강한 하루의 시작을 위해서 아침을 간단하게라도 먹고 싶지만 이미 아침 식사와 잠을 맞바꾼 지 오래라 여간 힘든 게 아니다. 퇴근 시간도 저녁 늦은 시간이 대부분이라서 굳이 챙겨 먹는 일도 없고 이러다 보니 하루에 한 끼만 먹게 되었다.
사실 뭔가를 만들어 먹는 일을 위해서는 하루에 나에게 주어진 에너지를 배분해야 하는 일이다. 이 에너지의 대부분이 일을 하는데 쓰이고 나서부터는 뭔가를 만들어 먹는 일이 제법 큰일이 되어버렸다. 캐나다로 오기 전 몇 달도 그러했다. 일의 강도가 세고 학교 생활을 같이 해야 하다 보니 내가 가진 에너지는 그 두 가지 일을 하는 것에 다 쓸 수밖에 없었다. 쉬는 날에는 친구와 외식을 하거나 배달 음식을 먹었던 거 같다. 그래도 같이 살던 친구와 음식을 해 먹던 날도 있었는데 역시 혼자 만들어 혼자 먹는 일은 제법 재미가 없기도 했다. 지금은 쉬는 날 음식을 좀 해 먹기는 하는데 귀찮은 날이 많아졌다. 먹는 일을 게을리하는 것 또한 나의 세계가 좁아지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좀처럼 이 귀찮음이 사라지지 않아 고민이다. 매일 비슷한 음식들을 먹고 비슷한 일들의 반복은 역시나 좋지 않음을 잘 안다.
한 달이 채 안 남은 4년 만의 긴 휴가를 앞두고 나는 요즘 제법 신이 났다. 한국에 가기 전 일본에 들러서 갈 계획이라 또 가고 싶었던 식당을 예약하고 그토록 먹고 싶었던 너무 달지 않은 심플한 디저트를 먹을 생각에 너무 신이 났다. 뭔가 사라진 감각들을 깨울 수 있을 거 같은 그런 생각도 들었다. 오래전에 친구와 그런 이야기를 나눴던 적이 있었다. 당시 친구는 지금의 남편과 연애 중이었는데 데이트를 하면서 맛있는 새로운 음식을 많이 먹기 시작했다고. 여태껏 익숙하게 알던 맛들이 아닌 새로운 맛과 재료들이 변모하여 접시에 담긴 모습을 은 감탄을 자아내곤 했을 것이다. 나 역시 이전에 레스토랑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맛보게 된 음식과 재료들로 더 넓은 세상을 알게 되었었다. 한국에 얼마나 다양한 재료가 있는지 그걸로 맛을 내는 일은 또 얼마나 다양한지 난 그걸 알지 못했었다. 그 이후로 잘 만들어진 음식을 만나는 일이 큰 즐거움이 되었다.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이 음식을 잘 만들려면 많이 먹어봐야 한다는 말이 이제는 이해가 간다. 그 말은 그런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음식에 그런 비싼 값을 지불해야 하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난 내가 지불할 수 있는 금액대의 요리에서 새로움을 경험할 수 있다면 기어코 돈을 낼 의향이 있다.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 재료를 사고 손질을 하고 익히는 일련의 과정은 정성이자 에너지를 담는 일이라 생각한다. 요리를 하기 위해선 꼭 필요한 마음이다. 이제 나의 목표는 재료를 버리는 일은 만들지 말자가 되었다. 나의 집과 주방이 있다면 더 큰 냉장고가 있다면 나는 빈 접시들을 채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실 잘 모르겠다. 여러 가지 일들을 하기엔 에너지가 줄어든 것은 분명하고 당장에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하나씩 하는 게 더 우선인 것 같기도 하다. 휴가에서 친구들과 함께 먹는 음식에서 친구들에게 만들어 나눌 음식에서 엄마가 해주는 밥에서 그 에너지를 다시 얻어오면 좋겠다. 뭔가 너무 많이 사그라들어버린 마음이 살아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