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irin Feb 04. 2024

12월의 점괘

시간은 지나가면서 켜켜이 먼지가 쌓이듯 조금씩 많은 것을 바꿔간다. 어제는 우리 집 강아지가 언제 우리 집으로 왔는지를 찾으려고 인스타 그램의 스크롤을 몇 번이고 계속 내렸다. 11년 전 아주 작은 강아지가 우리 집에 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오빠가 들고 온 작은 쇼핑백에 담겨온 강아지가 기억났다. 케이스가 없어 그렇게 담아 소중하게 데려왔었다. 그렇다면 우리 집 강아지는 12살 즈음이 아닐까 하고 엄마와 대화를 나누었다. 다음 달이면 내가 한국을 떠난 지 딱 5년이 된다. 6년 차로 접어든다. 강아지도 부모님도 그만큼 나이가 들었다. 노견이 된 우리 집 강아지는 시력이 많이 떨어졌다. 백내장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내 시간의 속도 보다 주변의 속도가 한없이 빨라진 거 같아 서글프다. 한국에 갔을 때 마중 나온 부모님의 부쩍 늙은 모습이 그러했고 오래된 아빠의 차가 조금씩 낡아진 집의 구석구석이 그러했다. 공항에서 집으로 가는 덜컹이는 차 안에서 뿌옇게 보이는 차 밖 풍경에 마음이 슬펐다. 한국을 떠나고 나에게 1년 1년은 매번 달랐다. 해내야 하는 일들이 많았고 정신없이 매일을 보내야 했다. 해마다 헤어져야 하는 친구들이 있었고 아쉬움이 가득 남은 마음들을 털어냈다. 지치면 추스르고 매일을 숙제처럼 보내다 보면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체감은 둔감해지곤 했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아주 조금씩 내 땅을 다져나가고 있던 그 시간에 주변은 생기를 잃어가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다행인 날들의 연속은 종종 죄책감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이 막을 수도 없고 순리가 있는 것인데 주변에 생기를 잃어가는 것에서 그 순리를 알아차린다는 것은 너무 서글프다. 한국에서의 20대 시절은 생기가 가득했던 날 들보다는 지쳐가는 날들이 많았다. 30대 후반의 지금 내가 당장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없어도 그때의 나보다는 분명 희망찬 사람이 된 것은 분명하다.


오래전 나의 별자리 점에서는 당시 그해 12월에 누군가가 떠날 거라고 했다. 그때의 나는 20대의 끝에서 허덕일 힘조차 없었다. 20대의 긴 시간은 나에게는 너무나도 지난했으며 어떠한 희망보다는 그저 이 모든 게 나아지기는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했던 거 같다. 점괘는 기가 막히게도 잘 맞았다. 그리고 그해 12월에 누군가 떠날 것이라는 말에 난 할머니를 떠올렸다. 그 해 나는 마음 한편에 정말로 그 일이 일어난다면 하는 불안감을 숨겨두고 살았다. 떠올려보자면 할머니는 당시에도 몸이 노쇄해지기 시작하면서 거동이 불편해졌던 거 같다. 당시의 점괘는 신기하게도 잘 맞았지만 12월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이 속절없이 지났다. 그렇게 한국을 떠났고 지난해 나는 4년 만에 한국을 다녀왔다. 그 인사를 끝으로 작년 여름이 끝나갈 즈음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내가 4년 동안 집에 없었는데도 할머니는 그걸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일을 마치고 퇴근한 손녀에게 인사하듯 일 갔다 왔냐고 물으셨다. 할머니의 시간은 흘러가지 않았다. 거동이 힘들어지고 청력도 시력도 아득해져 가는데 할머니의 모든 시간들은 뒤섞여 어느 시점에서 멈춰버렸다. 이미 100세를 넘긴 노인의 기억은 내가 살아온 시간보다 배로 더 많았다. 전쟁을 겪었으며 악착같이 자식들을 키워냈고 그 당시의 여성들처럼 배우지 못했다. 자신의 이름 석자도 쓰지 못하던 할머니에게 어릴 적 나는 할머니의 이름 세 글자를 작은 메모지에 연필로 적어줬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할머니는 아주 오랫동안 그 종이를 자신의 서랍 속 상자에 두었던걸 나는 기억한다. 이미 너무 많이 노쇄해버린 노인에게서 생기는 찾을 수 없었다. 길게 잠을 자고 밥을 먹고 계속 떠드는 모습은 수년동안 이어졌다. 마치 악몽을 말로 설명하듯 할머니는 종종 화를 내며 허공에 소리를 치기도 했고 그런 날은 모두가 쉽게 잠들 수 없는 밤이었다. 누구도 제어할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시간에 갇힌 듯 할머니는 지치지도 않고 계속 화를 내곤 했다. 그러다 또 어떤 날은 아주 즐거웠던 한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소리 내어 웃기도 했다. 그런 날에 나는 그런 시간이 더 많기를 바랐다. 할머니의 시간이 멈춘거라면 적어도 행복한 시절을 더 오래 품을 수 있으면 하고 말이다. 어릴 적 나만 기억하는 암울했던 그때의 기도처럼 말이다. 내가 한국을 떠난 후 내 시간이 느리게 부유하는 것처럼 할머니의 시간도 그러는거 같았다. 살아온 시간이 너무나 많이 쌓여 그 시간 안에서 부유하는 동안 육체는 더 늙어가고 기능을 잃어갔을 테다. 그렇게 점점 시들어가던 몸은 결국 더 이상의 기능을 멈춰갔고 일주일 동안 누워계시다가 떠나셨다. 가족이라는 형태 안에서 우리는 각자의 어려움과 고통이 먼저였다. 그것은 가족이라는 결속감을 쉽게 깨부수곤 했다. 안타깝게도 온정이 가득한 시절은 우리라고 묶인 나의 가족들에게는 많지 않은 순간들로 남았다. 늙어가는 부모를 돌봐야 하는 것은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자식들에게는 또 다른 부담이었다. 어른들은 이미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들의 사정이 뒤얽혀서는 어쩌면 우리는 이미 온전하게 행복한 가족의 형태를 가질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부고가 들리기까지 일주일은 내가 처음 겪는 떠나보내는 것에 대한 온갖 감정의 혼돈이었다. 울기도 많이 울었고 후회했다. 그리고 나서야 떠남을 받아들이고 애도했다. 집의 어른들이 돌아가실 때 나는 집에 없었거나 떠나보내는 자리에도 가본 적이 없었다. 결국 나는 또 가보지 못했다. 설령 내가 그곳에 있었더라도 떠나지 않고 그곳에 계속 남았더라면 나는 그 죽음을 잘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한없이 무너져 내렸을지도 모른다. 내 점괘에서 말한 누군가가 떠난다는 12월은 아주 오래 지난 후 늦은 여름날에 찾아왔다.


이제 더 이상 할머니의 안부는 들을 일이 없어졌다. 가족들을 밤새 뒤척이게 만들던 그 밤도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마치 긴 싸움 같았던 동행이 끝났다는 사실은 그런 것에서 느껴졌다. 한국에 잠시 다녀오기로 한 후 나는 집에서 지내는 게 걱정이 되었었다. 4년의 시간을 기억하지 못하던 할머니는 내가 집에서 지내는 한 달 동안에도 자주 허공에 말하곤 했다. 나는 밤새 이어폰을 끼고 새벽이 한참 지나서야 겨우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긴 밤 동안 모두가 잠을 자지 못하고 종종 날 선 언성이 오가던 그 밤을 나는 기억한다. 그 날이 선 감정들을 내 몸은 기억한다. 오랜 시간 새겨진 감각은 쉬이 지워지지 않는다. 행복함 보다는 불안이나 공포가 깃드는 것이 더 쉽다. 우리 가족들은 각자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을까 종종 생각한다. 할머니는 떠나기 전 일주일을 아무것도 드시지도 말도 하실 수도 없었다. 엄마는 그것이 보통 돌아가시기 전에 찾아오는 시간 같은 것이라고 말했었다. 떠날 때조차 편하게 가시지 못하는 거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시간들은 평탄하지 않았음을 알기에 마지막조차 힘든 끝이 되지는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100세를 훌쩍 넘기는 사이에 자식들은 중년의 시가를 넘었고 손자 손녀들은 너무 많이 커버렸다. 언제부턴가 명절의 북적임은 사라졌고 자식들은 치열하게 살다 서로 날 선 말들을 서슴없이 내뱉기도 했다. 그 지난한 시간이 일단락 난 거 같았다. 너무 오래 그것들을 지켜보다 야속한 세월을 끊임없이 복기하다 떠나신 거 같아 그게 슬펐다. 다시 돌아오던 날 주무시는 모습을 뒤로하고 그냥 나온 나를 후회하면서 울었다. 아슬아슬하게 깔린 고요함을 깨버리는 게 나는 무섭기도 했으니까. 이제 부모님은 숙면을 위해 반주를 하시던 일도 줄었고 종종 엄마와 영상 통화를 할 때 뒤로 보이는 빈방의 문을 보면서 나는 그제야 알아챈다. 누군가 생기를 잃어가고 시간이 멈춰버린 다는 것 그러다 그 사라짐조차 옅어지고 또 누군가의 시간이 멈춰버리는 이 순리에 나는 아직 서글픔이 더 크다. 애도의 시간이 더 쌓일 것이고 그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것 또한 순리일까.

결국 모든 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텐데 나는 얼마나 기억할 수 있을까? 가지고 있는 것들이 더 이상은 옅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할머니와 내가 공유했던 가슴 아팠던 시간들은 아직도 너무 선명해 종종 나를 괴롭히곤 했다. 할머니를 보내고 끝나지 않던 그 기억들이 질질 끌고 오던 그 시간들이 막이 내린 것 같았다. 나는 허공에 대고 말했다. 고생 많으셨다고. 그렇게 나지막이 인사를 전했다.


올해 나의 운세에서는 다정함을 베풀라고 했다. 그 마음들이 쌓일 거라고. 그동안 너무 많은 다정함들로 지난한 시간을 건너온 것을 생각하면 그래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다정함을 나누어준 친구들 덕분에 나는 충분히 울면서 할머니를 보낼 수 있었다. 내가 다 알지 못하는 할머니의 행복했던 기억들 속에서 할머니가 그곳에서만 맴돌기를 기도한다. 이제 우리가 쥐고 있었던 아픈 순간들은 다 훌훌 털어낼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묘지를 거닐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