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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rin Jun 07. 2024

균형 잡기

긴 겨울이 지나가고 금세 나무들은 초록색 잎을 가득 품었다. 눈부신 햇살이 거리에 가득 넘칠 정도로 매일의 여름은 싱그럽다. 오늘은 아침 일찍 수영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수영하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니 열심히 가야 한다. 아직은 킥판을 사용하고 있지만 레일을 왕복할 수 있게 되었다. 올해 겨울이 오기 전에 마음껏 수영을 하겠다는 즐거움은 참 기분이 좋다. 건물 앞에 도착하자 스탭 한 명이 반갑게 인사하며 건물의 전기가 나가서 잠시 사용을 할 수 없다고 했다. 보통은 공지로 알 수 있었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공지가 한참이나 지나고서야 떴다. 그렇게 발길을 돌렸다. 나처럼 운동을 하러 오던 사람도 되돌아 나오는 나에게 묻고는 발길을 돌렸다. 나온 김에 집으로 가지 않고 40분 정도를 걸어서 쇼핑센터가 있는 동네로 갔다. 오전에는 그리 덥지 않아서 걸어서 가기에 좋았다. 생각해 보니 이른 시간이라 가게들이 문을 열었을까 싶어 급하게 구글 지도를 켰다. 다행히 문 열 시간 즈음에 도착해 느긋하게 필요한 물건들을 골랐다. 가게 몇 곳을 들리고 돌아다니다 보니 금세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 시간을 체크하다가 결국 좋은 날씨에 커피를 들고 다시 되돌아 걸어가는 걸 선택했다.

그러고 보니 제법 오랜만에 휴일의 시간을 혼자 보내는 거 같았다. 오래 걸어 조금은 지칠 법도 한데 왜인지 좀 가벼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집으로 되돌아가는 길은 큰 공원을 들러 가로질러 한참을 빙 둘러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좀 더 더워지면 이렇게 오래 걷기 힘들 텐데. 평일 낮이라 길도 공원도 한적했다. 도로를 따라 내려가던 길에 공원 생각이 난 게 어찌나 즐겁던지. 노래를 들으며 걷다 공원에 다다르자 이어폰을 뺐다. 새소리 벌레소리가 깔리는 숲 사이를 걸었다. 종종 공원을 뛰는 사람들과 강아지와 산책을 나온 사람들을 마주쳤다. 나무가 가득한 길을 걷는 걸 좋아한다. 외국에 나와 살면서 가장 좋았던 건 도시에 큰 공원이 있다는 것 그리고 나무가 가득한 길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름이 끝나기 전에 이 길들을 질릴 만큼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요 며칠은 피로감이 심했고 읽다 덮어둔 책들을 하나씩 다시 읽기 시작했다. 나는 타인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편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토로만 한다면 그 이야기는 듣지 않는다.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고는 오래전부터 생각했지만 요즘 들어서는 그 일에 많은 에너지가 들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종종 금세 털어버리기도 하지만 알게 모르게 신경을 쓰는 경우가 있다. 나의 일상도 주변 사람들의 일상도 잔잔해야 평화롭다. 나무 사이를 저벅저벅 걸어가다 요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알게 모르게 신경을 많이 쓰고 있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런저런 일들과 소식들에 제법 지쳤던 것도 같다. 사소한 것들에 많은 기운과 감정이 쓰이는 것에 대해 잠시 고민했다. 절에 들어가 세상과 단절하고 사는 삶 아니고서야 피할 수 없는 노릇이다. 꼭 필요한 일들에만 기운과 감정을 쓰고 싶지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혼자 보낼 수 있는 시간이 가장 중요한 순위가 되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긴 시간을 걸어도 지치지 않는 이유를 찾은 것이다. 피로함을 뒤로하고 기어코 읽던 책을 마저 다 읽었는지도 이해가 되었다. 소모되는 감정이 많으면 채울 수 있는 다른 것들을 찾기 마련이다. 아주 오랜만에 쉬는 하루를 온전히 잘 보낸 거 같다. 긴 산책도 하고 필요한 물건들도 샀고 집으로 돌아와 청소도 했다. 일할 때 입을 바지 길이도 수선했다. 많은 일들을 혼자 했지만 마음은 많이 가벼워졌다. 역시 가장 중요한 건 균형을 잡는 일이다.


가장 치열하게 아름다운 여름은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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