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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기차여행

by kirin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권, 유효기간!


그 두 단어가 떠오르고 난 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여권의 유효기간이 1년이 남지 않았다는 걸 이제야 깨닫고야 말았다. 친구는 나의 예상대로 당장 여권을 갱신하라고 했다. 새로 비자를 받으려면 여권의 유효기간이 중요한데 그걸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사는 곳은 영사관이 없는 지역이다. 급하게 영사관 출장 일정을 찾아보니 이미 지난달에 방문했었다. 지지난달에도 왔던걸 보면 또 오지는 않을까 싶어서 일정을 찾아봤다. 하지만 역시나 이번 달은 일정에 없다. 캐나다에는 한국 영사관이 세 군데로 가장 큰 도시인 토론토, 밴쿠버, 몬트리올에 있다. 동부에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는 몬트리올이 가장 가깝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몬트리올에 가야 할 거 같다고 말했다. 다행히도 친구가 살고 있는 도시라서 잘 곳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갈 방법이 문제였다. 차로 갈 수 있지만 내가 운전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일단 차로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비행기로 가는 것인데 티켓 가격을 검색하는 순간 어떠한 고민도 없이 창을 닫았다.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게 동부 간 국내선 비행기가 왜 이렇게 비싸야 하냐는 것이다. 여기서 몬트리올은 비행기로 한 시간 거리인데 왕복 천 달러 정도였다. 한화로 하면 백만 원 정도가 드는 것이다. 내가 동부에 살면서 드는 의문이 과연 동부 간 국내선 비행기가 싼 시즌이 있을까이다.


모아둔 돈으로 아껴 살아야 하는 현직 백수로써 남은 선택은 단 하나. 기차이다. 다행히 동네에 기차역이 있었다. 스피커폰으로 친구와 통화를 하면서 기차표를 검색했다. 매일도 아닌 일주일 세 번 기차가 다닌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 몬트리올까지 기차로 얼마나 걸릴까? 무려 19시간이다. 차로 가면 8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를 두 배이상 걸려서 가야 한다. 서울에서 부산이나 대전까지 단 몇 시간 만에 가는 걸 생각하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의 개념이다. 자 그렇다면 좌석을 봐야 한다. 가장 싼 티켓은 이코노미인데 그중 환불이 안되고 좌석 지정 옵션이 없는 티켓이 가장 싸다. 도저히 19시간이 감이 오질 않아서 침대칸 중 가장 싼 티켓의 가격도 찾아본다. 없는 살림에 편하게 갈 것인가 고민을 하다가 여러 옵션으로 가격을 확인해 본다. 왕복으로 침대칸을 이용할 것인지 아니면 가장 싼 이코노미 티켓으로 할 것인지. 두 가지 옵션의 왕복 가격 차이는 한화로 하자면 30만 원 정도 차이가 났다. 그렇다면 갈 때나 돌아올 때 한 번만 편하게 올까 싶었지만 그럴 거면 그냥 돈을 아끼자 싶었다. 어차피 쉬는 마당에 기차 좀 탄다고 얼마나 피곤할까 싶기도 했고 여권을 새로 발급받기 위해 드는 비용까지 생각하면 그냥 가장 싼 티켓을 사는 게 옳다. 나는 바로 다음날 출발하는 기차를 예매했다. 한국에 살면서도 기차라고는 몇 번 안 타봤는데 이렇게 갑자기 긴 여정을 기차로 해야 하다니. 하지만 남는 게 시간뿐인 나는 돈 대신 시간을 써야 했다. 배낭 하나에 짐을 챙기고 아침부터 밀린 빨래를 했다. 다른 세입자가 먼저 세탁기를 쓰는 바람에 내 예상과 다르게 집에서 나가야 하는 시간까지 내 빨래는 여전히 건조 중이었다. 일단 다급하게 빨래를 꺼내고 옆방 친구의 도움을 받아 차로 기차역까지 갔다. 19시간 동안 먹을 물과 간단한 음식을 샀다. 다이닝 칸이 있지만 굳이 사 먹고 싶지는 않았다. 너무 뻔한 음식을 돈을 좀 더 지불하고 사 먹을 생각은 없었다. 지정 좌석이 없어 어떻게 타야 하나 싶어 타기 전에 승무원에게 물었다. 출발지가 아니라서 먼저 탄 승객들은 이미 창가 쪽 자리에 앉아있을 거라고 했다. 혹시라도 나중에 누가 여기 내 자리라고 비켜달라고 하면 어쩌나 걱정을 하면서 기차에 올랐다. 역시나 혼자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없었다. 대강 눈치껏 어떤 여성분 옆에 앉았다. 승무원은 내가 자리에 앉으니 티켓을 확인하고 무언가를 적은 종이를 머리 위 짐칸 선반에 꽃아 두었다. 한참을 둘러보면서 저게 뭘까 생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리는 역 이름의 약자와 인원수였다. 승무원분들이 너무 친절했고 작은 동양인인 나에게 좌석은 너무나도 넉넉한 공간이었다. 발받침도 있어서 편리했다. 다행히 나중에 빈자리가 생겨서 옮길 수 있었고 보던 드라마를 다 보고 영화를 두 편이나 봤다.


창 밖으로 눈 쌓인 강 아니면 평지와 나무들이 보였다. 처음에는 너무 천천히 가길래 그래서 19시간이나 걸리는 걸까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 19시간 동안 정말 많은 역에 정차했다. 늦은 밤부터 새벽동안을 제외하고는 멈추기도 자주 멈추고 정차하는 역도 너무 많았다. 앉았다가 몸을 구겨서 옆자리에 발을 올리고 누웠다가 하면서 긴 새벽을 보냈다. 생각지도 못한 긴 여행이었다. 너무 피곤했지만 오랜만에 보는 친구가 반가웠고 역시 도시에 오는 일은 즐거움이 함께한다. 일요일에 출발해 월요일에 도착했고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는 수요일에 타서 목요일에 도착한다. 어쩔 수 없이 며칠 동안 머무를 수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집으로 가 짐을 풀고 점심을 먹었다. 밖으로 나가 친구의 쇼핑을 도와주었다. 지갑의 여유가 없으니 놀랍게도 소비 욕구는 사라졌다. 친구가 데려간 펍에서 친구가 맛있다고 하는 맥주도 마시고 참으로 오랜만에 즐거운 하루였다. 빠르다면 올해에는 친구와 함께 살기로 했었는데 사람의 인생이란 이렇게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다음날 부랴부랴 영사관으로 가서 업무를 봤다. 사람이 거의 없어서 놀랐다. 밴쿠버의 영사관은 늘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말이다. 역시 한국답게 새로운 여권을 빠르게 배송받을 수 있는 서비스가 있었고 도착한 여권을 또 빠른우편으로 내가 사는 곳까지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돈을 내면 가능하다. 빠른 국제 우편 서비스의 요금은 이해가 갔지만 이곳에서 내가 사는 지역으로 보내는 빠른우편은 27달러가 좀 넘었다. 우체국에서 전용 우편 봉투를 파는데 그게 그 가격이었다. 그래도 돈 내고 빨리빨리 서비스라도 가능한 게 다행이지 싶었다. 몬트리올은 내내 눈이 내렸다. 함박눈은 아닌데 가벼운 눈이 종일 내렸다. 길은 이미 질척거려서 엉망이었다. 친구의 부츠를 빌려 신고 엉망인 길 위를 많이도 걸었다. 우리는 걸어가면서 길 한쪽에 잔뜩 쌓인 눈을 지나치지 못하고 오리를 만들어댔다. 길을 가던 사람들을 우리를 보고 웃어 보이기도 하고 오리를 귀여워하기도 했다. 눈이 너무 가벼워 완벽한 오리를 만드는 게 쉽지 않았지만 친구는 몇 번이고 오리를 만들었다. 눈을 꽉 채워 꾹꾹 눌러주고 가볍게 두 번 탁 탁 쳐서 열어준다. 하지만 대부분은 여는 순간 갈라져 있었다. 만들어둔 오리를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조심스럽게 손에 올려보기도 했다. 바람이 많이 불고 눈도 왔는데 카메라를 들고 나온 사진학과 학생들에게도 좋은 피사체가 되어주었다. 좀 더 좋은 눈이 왔다면 모든 길가에 오리를 만들어 둘 수 있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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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에 있는 스케이트장에 가서 못 타는 스케이트를 재밌게 타고 오랜만에 곱창도 먹었다. 친구 덕분에 호텔비도 아끼고 맛있는 밥도 얻어먹고 그래도 난 참 좋은 사람들 덕을 많이 보는구나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오던 날 미술관에 들러 많은 그림들을 봐서 너무 좋았다. 여행을 가면 항상 미술관을 가는데 전시를 못 본 지 너무 오래라 무조건 가고 싶었다. 생각보다 많은 그림들을 볼 수 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머물 수 있었다. 나는 오래된 그림에 남은 이름 모르는 사람들의 표정과 강아지들을 좋아한다. 표정이 없는 그림들 보다는 사람들의 감정이 확연히 드러난 섬세한 그림들을 좋아한다. 조심스럽게 그림에 가까이 다가가 가만히 보면 웃음이 나기도 한다. 이렇게 오래된 그림들은 어떻게 오랫동안 남아서 기록이 되었을까 생각하면 참 신기하다. 어떤 작품은 누가 그렸는지도 모르는 작자 미상의 작품도 있었다. 그 사람은 자신의 그림이 큰 도시 전시장에 걸리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이렇게 오랜 시간 어쩌다 남았으니 그것 또한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당신도 나처럼 한 치 앞을 몰랐을 겁니다. 괜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는 기차는 19시간 30분이 걸렸다. 전날 잔뜩 긴장해서 탄 스케이트가 문제였던 건지 자꾸만 왼쪽 엉덩이가 아파서 한 자세로 오래 앉아있는 게 곤혹스러웠다. 계속 뒤척이다 잠을 자는 것도 쉽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일정이 있어 결국엔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일을 마치고 짐을 풀고 샤워를 했다. 잔뜩 꺼낸 빨래들도 세탁을 했다. 넓은 침대에 누우니 피로가 풀리는 거 같았다. 기분이 좋았다. 저녁엔 갓 지은 밥에 해두고 갔던 반찬들로 밥을 먹었다. 이사 온 지 한 달이 채 안되었는데 부쩍 이 집이 편한걸 보니 이 집이 마음에 드는 게 분명하다. 최근 들어 시간이 가장 빠르게 지나간 거 같다. 순식간에 4일이 지나갔고 그중 이틀은 기차에서 보낸 거 같다. 아무래도 나중엔 꼭 침대칸을 타자고 생각해 본다. 분명 비행기보다는 쌀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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