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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여름을 보내면서

by kirin

아주 오랜만에 손님이 다녀갔다. 퇴사를 한 친한 동생은 크게 고민도 없이 비행기 티켓을 끊고 열 시간이 훌쩍 넘는 시간을 넘어 이곳으로 와주었다. 호주에 살 때 친한 언니가 한번 와주었고 이후로 친구가 먼 곳으로 와준 것이 두 번째였다. 여름의 곳곳이 들쭉날쭉하던 시간들을 보내다 만난 손님은 더없이 반가웠다. 좁은 나의 방 한쪽에 잠을 잘 수 있는 곳을 마련하고 늦은 밤까지 와인을 마셨다. 나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일상의 공간에 오래전부터 익숙하게 남아있던 사람의 등장은 작은 활기를 가져다준다. 늘 오가던 거리를 걸었고 몇 번이고 친구들과 갔었던 식당을 갔다. 내가 존재했던 익숙한 곳에 내가 등장하는 것과 나만의 익숙한 곳에 친구가 등장하는 기분은 많이 다르다. 친구는 도착한 날 내가 일하는 곳으로 먼저 와주었다. 들뜨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멀리서 와 준 손님은 늘 귀하고 반가울 뿐이다.


종종 지나간 시간들이 참 아득할 때가 있다. 그 아득함은 나만 느려진 시간에 남아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너무 빨리 지나와버려서 멍해지기도 한다. 불현듯 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이 10년 가까이 되어간다는 사실에 나는 아직도 매번 늘 처음 그 시간을 세어본 것처럼 놀란다. 고등학생에서 결혼 5년 차가 되기도 했고 대학생에서 이젠 사회인이 되기도 하고 말이다. 가게에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받고 밖을 살폈다. 익숙한 뒷모습에 반가운 마음으로 쪼르르 달려 나가 인사를 했다. 퇴근 후 친구를 마주하고 앉은자리에서 뒤늦게 메시지를 확인했다.


난 언니가 그대로란 점이 너무 감동적이야. 난 대학생에서 직장인이 되어 여러모로 화가 가득한 사람이 되었는데도!!


참으로 다행이구나 싶었던 반가운 첫인사였다. 슬프기도 했고 우울함에 져버리기도 했던 시간들을 돌고 돌아 나는 그대로인 사람이 되었다. 요즘은 그저 어느 하나도 예측할 수 없는 것 투성이인 내 인생을 보자니 작년의 시간조차도 아득하다. 불과 1년 전의 나는 그저 내가 생각한 것들이 하나씩 이루어질 거라 믿었다. 그사이 많은 것들이 바뀌었고 나는 또 친구들 덕분에 아득한 내 시간을 이어갈 수 있었다. 여러모로 사람의 일은 알 수 없다는 것은 종종 나를 뒤에서 밀치기도 했고 누군가의 손을 잡고 겨우 올라오기도 했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의 최악의 순간을 모면한 것을 생각해 보자면 그래도 난 누구보다도 다시 돌아와 내가 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건 아닐까. 내가 시작한 이 시간들은 여전히 내가 몰랐던 나를 알아가는 시간들로 쌓였다. 너무 오랫동안 자각하지 못했던 건지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모를 면면들이 불쑥 나타나곤 했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어떤 것은 이해하려 하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아직도 도통 알 수 없는 것투성이다.


A는 참 똑 부러지는 친구다. 나보다 어리지만 늘 모든 것에 열심이고 누구보다 잘 해내는걸 옆에서 보자면 그 당찬 모습이 나와는 너무 다르다. 종종 연락을 하면서 A의 직장생활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우리는 얼굴을 마주하고 서로의 안부를 말하느라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난 이제 한국을 떠난 지 몇 년 지났고 또래가 아닌 나보다 어린 친구들의 사회생활을 들을 일이 많지는 않다. 쉽지 않았던 회사생활을 끝낸 A의 이야기를 듣자니 대견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리고 내 친구들이 20대의 사회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불합리함을 왜 지금의 20대를 보내는 친구에게도 들어야 하는 걸까 속상했다. 많은 것들이 변하고 있지만 때론 무엇도 바뀌지 않는 것들에 무력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도 각자의 자리에서 충실히 살아가다 이렇게 만날 수 있다는 게 참 감사한 일이라는 걸 이젠 더 많이 느낀다.

친구가 머무는 동안 내 작은 방에서 주방에서 그날 사 온 술을 마시면서 각자 좋아하는 음악을 이야기하기도 했고 A가 좋아하는 밴드의 음악도 들었다. 몇몇 노래들은 내가 좋아하는 노래이기도 했다. 드라마를 잘 안 보는 나에게 자신이 재밌게 본 드라마 얘기도 해주었다. 오랜만에 별 거 아닌 이야기들을 잔뜩 풀고 또 풀어도 할 이야기가 많다 느끼는 순간들은 참 기분을 좋게 만든다.


다행히도 날씨는 좋았다. 친구를 데리고 어디라도 다녀와야 했을까 싶을 만큼 말이다. 항상 상상 속에서는 친구들을 데리고 멋진 곳을 다니는 생각을 하곤 한다. 하지만 난 운전면허만 가지고 있는 운전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친구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일을 관두었다. 그때 일을 안 하고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친구가 돌아가던 날 나는 오후 출근이었다.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 같이 밥만 먹고 역에서 헤어져야 했다. 역에서 인사를 하는 친구의 아쉬움이 보였지만 우리 또 조만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그런 마음을 남겨두어야 누군가 떠날 때도 이제는 괜찮다는 걸 잘 안다. 이제는 잠깐 머물던 사람이든 좀 오래 머물던 사람이던 늘 내가 남아 인사를 해야 하는 일들이 많아졌다. 내가 떠나는 사람일 때보다 남아야 하는 사람일 때 마음은 더 일렁인다. 그 마음이 하룻밤에 끝나기도 했고 며칠을 일렁여 그걸 잠재우기 위해서 애를 써야 하는 날들도 있었다. 아주 잠깐의 다른 일상이 금방 끝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먼 곳을 다니러 와 준 사람에게 갖는 고마움은 조금 다르다. 늘 갑자기 거기에 가려고 해! 하는 말은 너무나도 생기가 넘치는 즐거운 이야기니까.


올해 여름은 햇살도 많이 누리고 친구도 만났고 참으로 즐거웠다 말할 만하다. 길거리의 풍경은 빠르게 바뀌었고 여름은 끝났다. 유독 올해 바뀌는 계절이 너무 크게 와닿았다. 아마도 작년 이맘때가 생각나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썩 유쾌하지 못했던 시간들 때문인지 자꾸만 예전 기억이 났다. 그때의 마음들을 바꿔 줄 시간들이 친구들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며칠 동안 들쭉날쭉 하던 날씨는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집에서 걸어서 30분 정도 걸어가면 호수가 있는 공원이 나온다. 여름이 지나가는 게 아쉬웠던 건지 그저 갑자기 시간이 많아져서인지 마침 토요일마다 열리는 마켓을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를 데리고 나온 사람들과 한 손에 물건이 담긴 각자의 장바구니를 든 사람들이 보였다. 공원 안쪽에 작은 통로 하나에 천막들이 줄이어 서있었다. 적당히 붐비는 사람들 틈으로 들어가 찬찬히 둘러보았다. 가게마다 들고 온 과일들과 채소들이 조금씩 달랐다. 사람들은 가판대 앞에서 인사를 나누고 짧은 이야기를 나눈다. 주인 옆에 가만히 서있는 강아지들은 크기가 제각각이다. 본가에 있는 강아지 생각에 인사라도 나누고 싶지만 실례가 될 거 같아 곁눈질로 인사만 할 뿐이다. 크기도 제각각인 다양한 색깔의 재료들은 여름의 풍요로움을 보여준다. 여름이 지나면 잠시동안 볼 수 없을 것들. 커피를 한잔 사고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사서 잔디밭에 앉았다. 이어폰을 끼고 가만히 주변을 살폈다.


정말로 여름이 다 지나갈 때가 되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 한참을 앉아있었다.


늘 계절의 변화는 갑자기 하루아침에 풍경을 바꿔버리는 거 같다. 옷장을 정리했고 꽃들이 지고 나뭇잎의 색이 바뀐다. 마지막으로 필 꽃들이 바삐 피어났다. 나는 새로운 곳에서 일을 시작했고 친절한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 다행이구나 생각했다. 괜한 고민들에 걱정을 하다가도 잘 될 거라는 다독임과 함께 다 덮어버렸다. 예상밖의 일들은 계속해서 일어났지만 결국은 뭐든 잘 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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