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떨어져 살기 시작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식 와 꼭 엄마와 통화를 한다. 종종 엄마는 같이 살았다면 하지 않았을 말을 문자로 보내곤 했다. 생일엔 축하한다 사랑한다 하기도 하고 자랑스럽다는 말도 종종 하시곤 했다. 예전에 친구랑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아시안 부모들은 절대 자녀들에게 자랑스럽다는 말을 안 한다는 이야기였다. 나도 그렇게 자랐는데 엄마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지 물리적 거리가 멀어져 그런 건지 그런 말을 서른이 훌쩍 넘어서 듣게 되었다.
엄마는 종종 집에 남아있는 어릴 적 사진을 찍어서 보내곤 했다. 초등학교 졸업식 때 찍은 사진도 있었고 20대의 나도 있었다. 그러다 며칠 전 엄마는 내가 어릴 때 받았던 상장들을 어디서 찾은 건지 하나씩 찍어 사진으로 보내주었다. 그러면서 엄마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 딸 좋은 상 많이 받았네. 훌륭한 내 딸내미 엄마가 부끄럽다.
나는 웃으면서 잘 낳아준 엄마 덕분이라고 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왜 나에게 부끄럽다고 한 걸까. 그러다 생각이 났다. 아주 어릴 적 난 우리 부모님을 부끄러워했었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만 해도 부모님의 학력이나 직업을 물어보던 때가 있었다. 부모님 두 분 모두 고학력자는 아니셨고 엄마는 중학교를 졸업하지 못하셨다. 엄마는 장녀로 자라 서울로 와서 공장에 취직해 재봉일을 배우셨다. 나무 조각을 하는 아빠와 재봉일을 하는 엄마의 직업을 말하는 일이 괜히 부끄러웠다. 어린 마음에 회사원이 아닌 공장에서 일하는 게 부끄러웠던 거 같다. 엄마는 젊었을 때부터 재봉일을 배워 지금까지도 그 일을 하고 계신다. 이제는 손재주가 좋은 부모님의 직업이 누구보다 자랑스럽다고 생각한다.
엄마는 자신이 부끄럽다고 했지만 나는 안다. 누구보다 독하게 버텨낸 사람이라는 걸. 나의 10대 시절은 몇 년을 제외하고 기울어진 집안의 형편은 쉽사리 좋아지지 않았다. 10대의 어느 시절 우리 가족들은 흩어져 살 수밖에 없었다. 그때 엄마와 나는 단 둘이 반지하 단칸방에서 지내야 했다. 그 시절의 기억은 많이 남아있지 않은데 아마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 많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살던 그 반지하 단칸방은 모텔촌 안에 있는 곳이었다. 담을 경계로 모텔이 즐비한 동네에 작은 대문이 있던 그 집이 우리 집이었다. 한 번도 친구들을 집에 데려온 적도 없었고 늘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와서 혼자 저녁을 먹고 시간을 보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로 그 시절에 남아있는 기억은 손에 꼽을 정도로 없다.
그 동네는 여름 장마 때면 물에 잠기곤 했다. 그 집에 살면서 나는 여름이 가장 싫었다. 장마가 시작되면 학교에서 늘 집 걱정뿐이었다. 혹시 또 방에 물이 들어차면 어쩌나 내내 그 생각뿐이었다. 어느 여름날 어김없이 비가 쏟아지는 장마가 시작되었다. 그날은 집에서 혼자 혹시나 물이 역류하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퍼붓던 비를 이기지 못하고 물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역류한 물은 금세 집안으로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행히 집주인아주머니가 내려와 물을 퍼내는 걸 도와주셨다. 다행히 방까지 들어오진 않아 현관을 넘어온 물을 퍼내고 청소를 했다. 그날 엄마는 밤늦게 집에 왔다. 술에 잔뜩 취해 들어온 엄마는 물이 들었던 집을 보면서 울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원망하기도 하면서 엄마는 울면서 한탄을 했다. 그때 엄마를 보고 울었는지 가만히 앉아 듣기만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울었던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하지만 비가 쏟아지던 여름에 어린 딸 앞에서 대성통곡을 하던 엄마의 모습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엄마는 내가 다른 집의 자녀들처럼 좋은 대학에 가고 취직을 하길 바랐다. 하지만 난 공부를 하지 않았다. 2년제 전문학교를 나와 전공을 살려 일을 하다가 카페에서 일을 했다. 그때의 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내세울 것 없는 20대였다. 어느 날인가 아침부터 엄마와 언쟁이 붙었다. 언쟁의 끝은 엄마의 네가 공부만 했어도 고생스러운 일은 안 했을 거란 핀잔이었다. 출근길에 그 말을 듣고 화가 나 문을 박차고 나갔다.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도 씩씩거리고 있는데 엄마에게 미안하다는 문자가 왔다. 의외였지만 여전히 난 화가 가라앉질 않았다. 그때의 나는 엄마에게 부끄러운 딸이었을까.
같은 학교에 다니던 친구가 크리스마스 즈음 교회에 데려갔다. 친한 사람이라곤 친구 한 명인데 친절하지만 나에게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뻘쭘하게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늦어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교회인 한 분이 데려다주시겠다고 했다. 아마 친구네 집에 친구를 먼저 내려주시고 우리 집으로 갔던 거 같다. 조용한 거리에 모텔 간판이 가득한 동네로 차가 들어서자 괜히 창피했다. 나는 모텔들 사이 작은 문을 가리키며 저기서 내려달라 말했다. 그분은 그냥 잘 들어가라고 인사만 해주셨으면 되었을 텐데 이런 곳에 사는 나를 안쓰럽게 여기셨다. 정확히 나에게 한 말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말을 듣고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었다.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을 들킨 나는 모욕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후로 친구네 교회는 가지 않았다. 날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건넨 악의는 없었을 그 무례함이 종종 생각났다. 아마도 동정심 같은 거였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한참 흐르고 우리는 그 집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햇빛조차 안 들고 곰팡이가 올라오던 방안의 벽. 그 집에서 살았던 몇 년 동안 기억에 남았던 일은 시간의 순서와 상관없이 뒤죽박죽 뒤섞인 채 기억에 남았다. 그 남은 기억 중 좋았던 기억은 단 하나도 없다. 그때의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부끄러움에 쌓여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썼을까 아니면 그보다 더 전에 있었던 나를 불행하게 만든 사건에 발목이 잡여 화를 내며 살았을까. 그 시절의 엄마도 나처럼 부끄러운 시간이었을까 그저 불행하고 힘들었던 시절이었을까. 종종 엄마는 친구들의 자녀들이 해준 자랑할 만한 이야기들을 하곤 했었다. 나는 엄마의 자랑이 될만한 멋진 딸은 아니었다. 나는 20대를 보내고 30대가 되면서 뭘 해 먹고살아야 하나 그런 고민을 했다. 한국을 떠나 기채 한 달도 남지 않았을 때 나는 엄마에게 호주로 가겠다고 말했었다. 끝까지 나를 붙잡던 걱정을 외면하고 나는 내 결정을 따르기로 했었다. 부모에게 더 나은 자식이 되기보다 내가 할 수 있는 걸 찾아야 했다. 지금의 나는 아직도 내 길을 찾고 있다. 하지만 목표가 있다는 것 늦었다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환경을 선택한 삶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 결정이 아니었어도 더 나은 삶을 가졌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엄마의 부끄럽다는 말이 조금 가슴 아팠다. 당신의 자식이 이만큼 버텨내고 살아낼 수 있었던 것은 분명 당신의 몫도 있다는 걸 아셨으면 좋겠다. 엄마가 보낸 상장들에는 글쓰기 대회에서 받은 상들이 대부분이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말이 너무 많아서 나는 늘 글을 썼다. 나는 종종 지나간 일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너무 힘든 기억은 쓰는 동안 울기도 했고 다 쓰지 못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나에게 꼭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처음 그때의 엄마와 나를 써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