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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헬로쿠쌤 Jun 18. 2022

<영화 300>, 에스더 그리고 모르드개

'이때를 위함이 아니겠는가?'

<영화 300>을 기억하는지?


2000년대 중반 개봉해서 대히트를 친 영화로, 스파르타 전사 300명이 페르시아 군대 수만 명과 맞서 싸운 전쟁을 그렸다. 영화를 본 사람들에겐 'This is Sparta!'라는 한 문장으로 다 설명되는 스파르타 전사들의 리얼한 전투씬과 용맹스러움도 일품이었지만, 페르시아 왕으로 나오는 '크세르 크세스(아하수에로)'의 한번 보면 잊기 힘든 독특한 외모와 '나는 관대하다'라는 대사도 꽤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참고로 '크세르 크세스'는 고대 그리스어 발음이고, '아하수에로'는 히브리식 발음으로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영화 300>과 성경 '에스더서'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뜬금없이 할리우드 흥행 대작과 성경에 어떤 관련이 있다는 것일까?

지성과 미모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는 왕비 에스더(Esther)는 성경에 나오는 역사적 인물이다. 그녀가 바로 <영화 300> 속 페르시아 왕 '크세르 크세스'의 왕비였다는 사실! 크리스천에게는 더더욱 재미난 역사적 사실이다. 여기서 크세르 크세스와 에스더의 사랑 이야기를 할 건 아니고,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결단력 있고 용감한 '모르드개'란 인물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에스더서'속 그 사람, 모르드개


에스더는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 사로잡혀 갔을 때 태어났고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사촌오빠 모르드개의 손에서 자랐다. 참고로 에스더와 소크라테스는 동시대 사람이다! 에스더가 페르시아의 왕비가 된 후 하만이란 사람이 유대인을 다 죽여도 된다는 왕의 허락을 받는다. 모르드개는 하만을 설득하는 등의 인간적인 방법을 제쳐두고 베옷을 입고 통곡하며 즉시 기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왕후 에스더를 찾아와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For if you remain silent at this time, relief and deliverance for the Jews will arise from another place, but you and your father's family will perish. And who knows but that you have come to royal position for such a time as this?"

(에스더 4: 14)


다시 말해,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네가 지금 이 시대에 태어나고 이 시대에 왕비가 된 이유가 바로 이 일 때문인지 모른다”라고 에스더에게 담대히 선택을 요구했다. 사실 처음에 에스더는 거절다. 당시는 왕이 먼저 부르지 않고 나갔다가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왕이 한 달간 에스더를 부르지 않았으니 혹여 별로 보고 싶지 않다면 더 위험한 일일지도 몰랐으나 하나님은 그 모든 이유를 막론하고 에스더를 들어 사용하시길 원했다.


결국 에스더는 유다 민족의 위기와 모르드개의 도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자신의 삶의 목적이 왕비로 살며 호강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리고 왕비는 성경 '에스더서'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을 결단하기에 이른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And if I perish, I perish.
(에스더 4: 16)


죽음을 무릅쓰고 왕에게 나아가 이스라엘 민족을 구하기로 결단하는 에스더의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한 부분이리라. 결국 에스더의 결단과 용기 그리고 지혜로 인해 유대민족은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를 통해 보는,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의 이유


크리스천이라면 혹시 이런 생각을 해본 적 있는지?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목적을 위해 각 사람을 특정한 상황에 두셨다는 것을. 이렇듯 사명을 깨달아 살아가는 삶이야 말로 모든 크리스천의 소망이자 목적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많은 순간 그럴듯한 이유를 대며 거절하는 경우가 많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혹은 내가 나설 자리가 아니라고...


그러나 크리스천의 명분은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죽음을 각오하고 왕에게 나아갔던 에스더처럼, 나에게도 어떠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지금 내가 있는 그 자리가 '이때를 위함'인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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