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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헬로쿠쌤 Dec 21. 2022

결혼 10년 차, 남편이 세탁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집안일, 남편에게도 기회를 주자

인터넷에 떠도는 유머 시리즈가 하나 있다.

남편이 혼자 마트에 가면 안 되는 이유, 남편한테 애를 맡기면 안 되는 이유 등 일명 '남편이 00 하면 안 되는 이유' 시리즈다. 관련 포스팅엔 각자의 남편의 일화를 담은 푸념 섞인 댓글과 공감이 수두룩하게 달리곤 한다.


그러다가 최근에, 그냥 웃고만 넘어갈 일이 아니란 자각이 들기 시작했다.



페미니스트도 아니고, 남녀평등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까진 아닙니다만...


남녀가 평등한 기회를 갖는 사회를 꿈꾸며 지지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거나 더욱이 페미니스트도 아닌 나다. 오히려, 남자와 여자 각자의 역할을 잘할 수 있는 부분에서 빛을 발하는 것도 의미 있고 좋다고 생각해 왔다.


거기에는 가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저것 꼼꼼히 더 신경 쓰며 동시다발적으로 세심하게 가정을 돌볼 수 있는 것은 여자라고 믿었으니까. 물론 이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내 믿음과 신념에 대해 좀 더 깊게 들어가면 이야기가 복잡해지니 이건 그냥 그렇다고 해두자. 그렇다고 전통적 혹은 유교적 가치관은 아니니 오해 마시라.


소위 알파걸로 자라온 나도 결혼 전까지는 살림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고 혹은 , 다행히도 사회에서 심한 남녀차별을 그렇게 많이 체험하지 못했다. (알파걸로 자라온 내가 전업주부가 된 이야기는 '전업주부가 된 알파걸'을 참조하시길)


결혼과 육아 그리고 집안일


집안일이라곤 제대로 해본 적 없는 내가 결혼을 했다. 아이가 없이 맞벌이를 할 때에는 가사노동이 크게 부담이 되지 않는다. 어차피 식사도 밖에서 해결하는 경우 많았고, 주말에 밀린 청소와 빨래 하며 지냈으니까. 나름의 재미가 있던 소꿉놀이 같은 신혼시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고 나서 시작된 육아. 바로 이때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시작하게 된 시점이기도 하다. 비로소 어른이 되고 철이 들기 시작했다고 해두자. 여러 이유로 풀타임 잡을 그만두게 된 나는 오롯이 가사와 육아를 떠맡았다. 남편의 직장 사정으로 인해, 2년 반 이상을 연고 없는 시골에서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어린 두 아이를 기르기도 했다.


남편은 밖에서 열심히 일을 하니까 집안일은 최대한 내가 하자는 주의였다. 내 안에 내재된 능력이 있었는지, 시간이 갈수록 집안일과 육아에 대하 노하우도 생기고 탄력도 붙어서 그야말로 멀티플레이어가 되어갔고, 가정이란 도메인의 장관쯤 되는 것 같은 성취감도 있었다. 물론 남편도 할 수 있는 한 육아와 가사에 참여하려 노력했다. 고마운 부분이다.



결혼 10년 차, 가사분담에 대해 생각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되도록 집안일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남편의 의지를 꺾으며 그 참여를 제한한 것은 바로 나였다. 남편이 집안일을 하면 나보다는 철저하게 하지 못하까, 일일이 설명하며 부탁하기 귀찮고 번거로우니까, 내 맘에 안 들게 해 놓으면 손이 두 번 갈 테니까 등의 이유로 말이다. 그래서인지 남편이 참여하는 집안일은 극히 제한적이 되었다. 아니, 될 수밖에 없었다.


신혼시절, 나를 위해 라면을 끓여주겠다며 부엌에서 한참을 요리(?)하던 남편. 그 시도를 격려하며 도와줬어야 하는 나는 그만 큰 실수를 했다. 라면도 하나 제대로 못 끓이고 부엌을 엉망으로 해놨냐며 타박을 줬던 것. 그 사건이 상처였는지 그 후로 남편의 라면을 얻어먹기까지 9년의 시간이 더 걸렸고 그게 바로 며칠 전이다.

집안일에 나보다 서툴러도, 시간이 오래 걸려도 기다려주고 도와줘서 함께 할 수 있는 즐거움을 찾았어야 했다. 그 지혜가 그때는 부족했다.


여기에 더해서, 출처를 알 수 없는 패배주의적인 생각. 즉, 나는 경제활동을 별달리 하고 있지 않으니 집안일은 내 책임이라는 생각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한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노력이 응당 있기 마련인데 유독 우리 사회에서 그 가치를 폄하시키는 면이 강한 듯하다.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을 깨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이 걸린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개인이 굉장히 흔하고 많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은 일종의 사회문제라고 여겨진다.



워킹맘도 전업맘도 육아와 집안일은 조금씩 바꿀 수 있다


전업맘이라고 해서 집안일과 육아가 더 쉬운 것도, 워킹맘이라고 해서 줄어든 것도 아닐 것이다. 한 가정의 웰빙과 행복을 위해 필수적인 일이기도 하고. 그 중요성을 잃어버리지 말자. 그런 맥락에서 점차 육아와 집안일에 참여하는 남편이 늘어나는 것은 반가운 일일 것이다.


그래서 결혼 10년 차, 남편이 세탁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기계를 다루고 만지는 일에 누구보다 능숙한 남편이지만, 유독 가사와 관련한 가전기기는 노터치였다. 내가 기회를 주지도 않았거니와 날 돕고 싶어 하는 신혼시절의 의욕도 점점 바닥이 났기 때문이리라.

알고 보면 결코 어렵지 않은 세탁기 사용법에 대해 남편에게 간단히 설명하고 시작 버튼을 눌렀다. 남편이 세탁 한번 하는 게 무슨 유세냐 할 수 있지만, 우리 부부에겐 큰 변화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 남편이 마트 가면 되는 이유 

                                                                     

종종 남편에게 마트에 들러서 필요한 걸 사 오라는 부탁을 한다. 장은 한꺼번에 내가 주로 보지만 종종 꼭 필요한 물품이 한두 개씩 빠지게 마련이기에. 그러면 남편은 어김없이 나에게 전화를 한다. 내가 설명했던 바로 그 제품은 없고 다른 뭐뭐가 있다며. 처음엔 한숨부터 나왔다. 그렇게 임기응변이 없어서야 센스 있게 좀 알아서 할 수없나. 내 욕심이었을까?

쇼핑 리스트에 적힌 액면 그대로 쇼핑을 하는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마치 내 맘을 읽는듯한 센스는 훈련의 축적과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30년 이상 집안일을 오롯이 담당한 친정엄마는 외출이 길어지면 아버지의 밥부터 걱정이다. 아마 그 세대 아내들 대부분이 그럴 것 같다. 오죽하면 아내가 곰국을 끓이면 남편은 긴장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까.

다 만들어 준비해놓은 반찬만 차려먹으면 되는 간단한 일인데... 시간이 오래 지나면 그리 간단한 현실이 아닌가 보다. 그럼에도, 지금이라도 남편이 자립할 수(?) 있게 조금씩 기회를 주라고 말하고 싶다


욕심을 버리고 차근차근 설명하고 기회를 주자. 처음부터 능숙한 남편들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 경험이 쌓이면서 익숙해진다. 다른 일도 마찬가지지아니 한가!


얼마 지나지 않으면 분명 더 효율적이고 더 즐거운 집안일과 육아를 남편과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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