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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선교 140주년, 이 땅을 다시 보다

[1900, 조선에 살다]를 읽고. 어둠이 걷히고 자유를 노래하다

by 헬로쿠쌤
100여 년 전 이 땅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금으로부터 별로 멀지 않은 과거의 이 땅의 역사와 상황에 대해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다. 학교에서 다루고 내가 배워왔던 한국사도 근현대사에 큰 초점이 맞춰져있지는 않다. 시험에 나오지 않는 범위라 더욱 주목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한국선교 140주년이 되는 올해를 맞이하여 선교역사를 포함한 근현대사에 관심을 갖고 공부해 나가기 시작했다.


140년 전 조선은 어두운 땅이었다. 일제시대와 6·25 한국전쟁으로 한바탕 진통을 겪은 후 기적처럼 이뤄낸 오늘의 한국 사회를 그 누가 상상조차 할 수 있었을까? 오늘의 한국 사회와 교회가 성장하고 발전한 것과 관련하여 선교사들의 헌신이 큰 역할을 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구한말 조선의 시골을 기록한 선교사, 제이콥 로버트 무스


조선 말기 역사나 사회상에 대한 외국인의 기록물은 그 수가 적지 않다. 그러나 대부분이 서울을 중심으로 한 지배 질서와 문화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제이콥 로버트 무스 Jacob Robert Moose(한국명: 무야곱) 선교사가 쓴 [1900, 조선에 살다 Village Life in Korea]의 특별함이 있다.


이 책이 한국어판으로 발간된 사연도 드라마틱하다. 무스 선교사의 외증손자인 제프리 폴 제이콥스가 우연한 기회에 2005년 오하이오주를 방문했던 옮긴이에게, 자신의 외할머니가 1901년 조선에서 태어나 장성할 때까지 살았다고 하며 이 책의 원본을 전달한 것이다. 놀라움과 사명감에 번역을 시작한 옮긴이의 마음은 어떠했을지 짐작할만하다.


글을 읽어나가며, 그 시절 시골의 풍경, 문화, 사회상, 사람들의 모습을 이렇게까지 애정 어린 시선으로 기술한 책이 있을까 싶었다. 직접 자전거를 타며 외부인이 아니라 조선 내부자의 시선으로 24년간 조선 방방곡곡을 누빈 무스 선교사. 한국의 아름다운 자연을 기술하고 인습과 악습에 갇혀 여전히 어둠가운데 있던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복음을 전하고 교육을 했던 애정 넘치던 사역자. 외부세계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던 조선을 위해 누구보다도 뜨겁게 헌신했던 선교사의 마음과 기도가 그의 글에서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다.



익숙하고 당연한 일들을 외국인의 시선으로


사계절이 뚜렷한 기후, 장마와 무더위 그리고 강산이 꽁꽁 어는 한겨울추위까지. 나에게 너무나 익숙했던 이 땅의 자연과 기후, 식생이 100년 전 외국인의 눈으로 관찰되고 기록된 것을 보니 새삼 새롭다.


무스 선교사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시골의 정겨운 모습들을 세심한 필체로 담아냈다. 온통 흰 옷을 입은 사람들, 평평한 돌판 위에 세탁물을 놓고 얼룩 없이 하얗게 될 때까지 방망이로 두들겨대는 아낙네들, 등에 아기를 없은 채 동전 던지기 놀이 삼매경에 빠져 있는 소녀들, 김치를 필두로 풍성하게 채워진 밥상 등의 묘사는 바로 얼마 전의 우리네 시골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누가 봐도 쇠락해 가던 1900년대 초반의 조선이었지만, 이 땅의 시골은 동시에 생명력 넘치는 백성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기도 했다.



믿기지 않을 만큼 어둡던 그 시절


반면 그 시절 이 땅은, 믿기 힘들 정도로 어두운 면이 꽤나 많이 있었다.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상식밖의 일들이 자연스레 일어났다고 해 두자.


가축과 같이 사고 팔리는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던 종들, 장옷으로 얼굴을 가린 채 외출해야만 했던 부인들, 소년들만으로 채워진 서당, 기이한 화장은 한 어린 신부들, 성리학의 나라이긴 하지만 민간신앙이 퍼져있어서 장승 앞에 모여 기원을 드리던 남녀노소들의 곱게 모아진 두 손은 무스 선교사에게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나 낯설기만 하다.


선교사라는 직분에 걸맞게 그는 이러한 모습들을 복음의 힘으로 보듬어 안아 사명감을 갖고 도와준다. 따라서 외부의 어떠한 도움도 없이 신도들의 힘으로 지어진 교회들이 방방곡곡으로 뻗어가는 모습은 무스 선교사에게는 보람이자 축복이었다.



21세기 대한민국 여성으로 글 다시 보기


어느새 세계적인 나라로 우뚝 선 대한민국.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꽃피우며 강대국 반열에 진입했다. 100여 년 전, 그렇게 암흑같이 어두웠던 이 나라가 말이다.


무스 선교사님의 글을 읽어가며 애처롭고 안타까운 그 시절 서민들의 모습에 마음이 아릴 정도였다. 특히 서민 여성들의 인권은 개념조차 희미할 뿐이다. 무스 선교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여자들은 초대도 환영도 받지 못한 채 이 세상에 오게 되어 조혼을 강요당하고 이름도 빛도 없이 살아갔다. 조선의 제도와 관습 속에 비정의와 비인간성 속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던 여인들의 삶의 적나라한 기록들은 읽어나가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편이 쓰려왔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조선만큼 여인이 그토록 대단히 필요한 존재로 여겨지는 곳이 없다고 무스 선교사는 말한다. 아내가 없는 남자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동정을 받고, 가장 불쌍한 남자로 여겨진다. 그 필요의 이유는 전혀 성경적이지 않긴 하지만.


복음이 닿지 않던 곳, 진리와 자유가 없던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겪던 무스 선교사님의 마음은 어땠을까. 오죽하면 어린 나이에 시집가는 혹은 팔려가는 여인을 보며 이사야 53장 2절, 예레미아 11장 19절을 인용해서 '마치 도살장에 끌려 나오는 양'이라는 비극적 묘사를 했을까.

'하나님, 이 글을 익는 모든 이들이 힘을 다하며, 우리 마을 소녀들에게 희망과 빛과 자유와, 그리고 구원을 보내게 하여 주소서!'라는 그의 기도가 깊은 울림을 낳는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한 아펜젤러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드린 첫 기도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시작으로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들은 의료, 교육, 구제 사역을 통해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했다. 기독교역사연구소에 따르면, 1885년 이후 100년간 내한한 선교사 총 수는 3천여 명으로 파악된다.


기독교는 한국 근대사회 형성과 변화의 주된 동기이자 요인으로 평가된다. 다시 말해 기독교 신앙은 한국 개화의 동력으로 교육과 의료, 민주의식, 독립운동, 한글 보급을 포함하여 그리고 일상생활 전반에 영향을 끼쳤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가장 큰 사명이었지만, 기독교 복음은 자연스럽게 한 사회 곳곳을 변화시켜 나갔다.


특히 선교사들이 이 땅에 변화를 가져온 가장 중요한 분야는 교육과 의료였다. 1910년 당시에는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 기독교계 사립학교가 전국에 751개에 달했다고 하며, 학생들은 이곳에서 신식 교육을 받고 자유, 민주, 인권 등 근대적 가치를 배울 수 있었다.


더하여, 성경에 입각하여 하나님 앞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인식을 가져와서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유교적 가부장제 속에서 남존여비 사상으로 고통받던 여성들은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를 통해 교육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한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을 통해 아내와 여성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깨닫는 성도들도 늘어났다.


이 책에서도 한 조선인 남자 성도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는 말씀에 비추어 매일밤 미처 고백하지 못했거나 뉘우치지 못한 죄는 없는지 살피곤 했다. 마땅히 해야 할 만큼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한밤중 곤히 자고 있던 아내를 깨워 자신의 남은 삶을 다하여 열심히 그녀를 사랑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가히 조선 최초의 크리스천 로맨티시스트다.


이렇듯 수많은 선교사들의 헌신과 사랑은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과 같이 많은 열매를 맺어 오늘의 한국교회와 사회를 이루게 되었다. 140여 년 전 복음을 전해받은 나라에서 이제는 선교사를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보내는 나라가 되었다. 100여 년 전 이 땅에 온 선교사들이 지금의 대한민국의 모습을 상상이나 했을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어두운 땅에서 오직 믿음으로 결단하여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사명을 다한 그분들이 우리나라의 진정한 영웅이 아닐까.


그분들이 뿌린 복음의 씨앗으로 인해 지금의 나도 성경의 가치를 믿고, 자유민주주의를 이해하며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음을 감사함으로 고백한다. 그리고 신앙의 힘을 믿기에 나 또한 이 나라를 위해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주어진 사명을 다하겠노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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