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누나가 말하는 '참 자유'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눅16:29-31]
29 "Abraham replied, 'They have Moses and the Prophets; let them listen to them.'
30 "'No, father Abraham, ' he said, 'but if someone from the dead goes to them, they will repent.'
31 "He said to him, 'If they do not listen to Moses and the Prophets, they will not be convinced even if someone rises from the dead.'"
[Lk 16:29-31, NIV]
크리스천이 아니더라도,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는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간략한 내용은 이렇다. 어떤 도시에 한 부자가 있었는데 지위, 명예, 권세가 대단하여 날마다 호화로운 삶을 살았다. 그의 집 대문 밖에는 나사로라는 이름의 거지가 있었다. 그는 병들어 일도 하지 못하고 부자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로 연명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나사로는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했다. 어느 날 두 사람 모두에게 죽음이 찾아왔다. 부자가 불꽃 가운데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보니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서 행복해하는 것이 아닌가. 부자는 고함치며 손가락 끝 물 한 방울의 자비를 구했지만 천국과 지옥의 차이만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 자기의 형제들에게 나사로를 보내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게 기회를 달라고 하지만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대답을 듣게 된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점 한 가지. 그동안 부자는 악하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그러나 성경에는 정작 이 부자가 어떤 악한일을 했다던지 죄를 지었다던지 지적하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더욱이 부자인 것 자체가 잘못인 것도 아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아브라함 역시 당대 최고의 거부가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그 부자의 잘못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바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으며, 오직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간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고 없다고 하는 인본주의, 자기 중심주의가 하나님을 대신한 부자의 우상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세상에서 비참한 삶을 살았던 거지 나사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았다. 참고로 그의 이름 '나사로'의 의미는 '하나님이 도우셨다'라는 의미다.
이처럼 나사로처럼 고난을 받아도 주를 인정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천국 백성이 되지만, 이 땅에서 아무리 화려한 삶을 살아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결국은 패망의 길이라는 것을 누가복음 16장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일의 결국을 알고 음부에서 고통받고 있는 부자는 아직 살아있는 자신의 형제들에게라도 천국과 지옥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지만, 아브라함은 그것은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씀, 즉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에 달렸다고 대답한다. 즉, 영생의 기준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믿고 깨닫는 것이라는 것이다.
탈북민 목사님의 메시지를 들은 적이 있다. 자신이 탈북한 이유는 거창하게 자유를 찾아서도 아니고 오로지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고 증언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 속에 북송되기를 몇 차례. 그분이 겪은 일을 감히 이해하고 공감하기에는, 북한 동포들의 아픔을 애써 외면한 채 자유 대한민국에 익숙해져 버린 나 자신이 한없이 죄송하기만 할 정도였다.
목사님에 따르면 북한에 사는 동안 '자유'라는 개념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고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었다고 한다. 오히려 자유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인 어감으로 세뇌교육을 받으며, 공동체의 일탈이나 방해를 하는 사람들을 소위 '자유 분자'로 불렀다고 한다. 이렇듯 자유를 알지도 보지도 못한 그에게 있어 자유 대한민국은 가히 신세계였다고 한다. 이동의 자유, 집회의 자유, 출판의 자유, 예배의 자유, 선택하지 않을 자유까지. 내가 이 땅에 태어나 너무도 당연히 누려왔던 많은 일들이 실은 대한민국이 쟁취한 역사의 선물임이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북한의 사상교육과 세뇌교육의 폐해도 인상적이다. 세뇌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목사님께서는 탈북 후 자유에 대해 이해해 갈수록 마르크스가 말한 '종교(기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말을 떠올리며 역으로 본인이 아편에 취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결과의 평등만을 강조하며 개인의 자유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만 사용한 공산. 사회주의 시스템의 역사적 교육을 봐도, 수많은 이들의 피로써 지켜낸 대한민국의 역사를 봐도, 자유는 결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자유에 대해, 더 정확히 말하면 성경의 진리에 근거한 자유에 대해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어찌 예수님을 알고 영접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Consequently, faith comes from hearing the message, and the message is heard through the word about Christ.
[Ro 10:17, NIV]
위의 로마서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생기는 것이며, 이로 인해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말하는 '참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자유는 마치 공기 같아서, 그것을 잃었을 때 비로소 그 가치를 알게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곱씹을수록 이해가 된다. 좌우의 이념 대립이 건국 이후 최고조라는 요즘의 대한민국에서 '자유'를 논하는 것은 어쩌면 가장 절실한 일이 아닐까.
좌파적 사고는 우리의 사고 패턴 가운데서 기본값(default)에 가깝다. 특별한 노력이나 체험이 더해지지 않으면 좌파적 사고를 벗어날 가능성은 높지 않다. 따라서 좌파적 사고는 어느 시대나 호소력이 강하고 감동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이를 뿌리치기가 쉽지 않다
[좌파적 사고 왜 열광하는가?]/ 공병호/ 공병호연구소
이와 같은 공병호 박사의 글은 작금의 현실을 가장 간략하고 간편하게 설명해주고 있는 것 같다. 당장 눈에 보이는 포퓰리즘적 정책, 결과의 평등 강화, 과도한 정부 개입, 목적을 위해서 수단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사고. 이럴수록 한 사회의 '자유'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언론과 시장은 정부의 눈치를 보며 정치인은 정권유지에 혈안이 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자유에 대한 위기가 느껴지니 '내가 당연히 여기던 자유가 얼마나 소중했던가'를 더욱 깊이 깨닫고 있는 중이다. 교회까지도 안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요즘 상황에 허탈함마저 느껴진다.
아무리 이념적 대립이 첨예한 사회가 되었어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근간이 되는 대한민국인으로서 이 땅을 살아가는 것에 감사하고 뿌듯함을 느낀다.
한국인으로서 이 소중한 자유를, 그리고 크리스천으로서 참 자유이자 진리인 예수님을 더 많은 사람들이 듣고 알아서 믿는 것이 나의 사명이자 한국교회의 사명이라고 본다. 전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이자 북쪽에는 최악의 인권유린 속에서 거대한 우상에 빠져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다. 자유를 이해하면 할수록 성경을 깨달아가면 갈수록 북한에 대한 기도가 나온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우리 대한민국과 한국교회를 들어서 쓰실 거라는 믿음과 함께. 그 믿음에 근거한 사명감으로 나라를 위한,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순종과 선한 싸움을 할 수 있길 다짐해 본다.
아무쪼록 자유의 근본인 성경말씀이 한반도를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한 번이라도 전해지길,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자유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길 이 땅의 크리스천으로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