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유학 생활의 부푼 꿈을 안고, 8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북반구 반도 땅에서 호주로 날아온 나. 20대의 나는 패기와 열정, 자신감으로 무장해 있었다. 대학원 전공도 한국에서 학부 전공과 비슷해서 크게 어렵지 않을 것 같았고, 영어도 못한다고 느끼진 않았으니까.
그런데, 이걸 어쩌나. 첫 학기 첫 과목의 첫 튜토리얼은 내가 알고 있던 대학 강의와는 전혀 달랐다. 2~30명의 학생들이 강사와 열띤 토론과 질문, 피드백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수업. 난 토론 수업에 익숙하지도 않았고, 그것도 영어로 토론하는 수업시간 내내 울고 싶은 심정이 들기도 했다.
서서히 바뀌고는 있지만 대학 입시 위주의 주입식 교육이 대한민국 사회에 만연해 있다. 선진 교육시스템을 지향하지만 현실은 좋은 대학을 위한 줄 세우기 위주의 공부가 아직 많다. 그래서일까? 나도 대학 입학 후에는 학교 시험 때 하는 공부 혹은 취직과 관련한 공부만 줄곧 해왔었다. 대학은 전문분야의 지식을 쌓기 위해 제대로 공부해야 하는 곳인데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호주의 대학은 우리와는 차이가 크다. 대학 진학률이 50% 정도인 호주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크게 차별받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 대학은 정말로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다. 그래서 현역(?)이라 불리는 고등학교를 갖 졸업한 학생들 뿐 아니라 뒤늦게 필요에 의해 대학 수업을 듣는 사람들도 많다. 우리네 문화라면 늦깎이네, 노땅이네 라는 수식어가 붙을 테지만 이곳에서는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 나는 대학원 수업을 들었기에 학생들의 나이대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었다. 특히 호주 로컬들은 직장에 다니면서 파트타임으로 수업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그 파트타임 수업이란 것도 무사히 통과하기 결코 만만치 않다.
토종 한국인으로서 대학을 한국에서 졸업했던 내가 호주대학원에 가서 느꼈던 차이점 몇 가지를 추려봤다.
1. 렉쳐(Lecture) Vs. 튜토리얼(Tutorial)
대학 강의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이미지가 있다. 학생들로 꽉 찬 강의실과 앞에서 설명하는 교수님. 그 이상 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호주에도 그런 강의가 있으며 Lecture라고 한다. 그러나 Tutorial이라고 하는 수업이 더 있어서 Lecture에서 다룬 내용에 대한 디테일한 부분을 짚어주며 심화할 수 있도록 토론식 수업을 진행한다. 출석과 참여 모두 중요한 수업이며 강사에게 얼마나 인상적인가, 즉 얼마나 열띠게 토론에 참여하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문제는 유학 초창기에 내가 이 튜토리얼에 대해 너무나 무지했다는 거다. 그러니 말문이 막힐 수밖에...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이상 바로바로 툭 튀어나오는데 시간이 좀 딜레이 된다. 물론 이 과정이 아주 짧아져서 유창함이 더해지긴 하지만, 모국어인 한국어에 비하겠는가! 게다가 한국에서는 토론 수업 자체가 많지 않았고 토론이 부담인 경우가 많았다. 본인의 의견과 맞지 않은 발언을 하면 인신공격으로 느껴서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호주에서는 토론 이슈 그 자체에만 집중하며 수업이 끝나면 쿨하게 신경 쓰지 않는다. 문화의 차이 인가 보다.
아무튼 렉쳐는 과목에 따라 출석체크도 하지 않고 과제만 충실히 내도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튜토리얼은 달랐다. 그래서 더 신경 쓰고 준비해 갔던 기억이 있다.
2. 우리 대학과는 다른 성적 평가 체계
'A 폭격기'라는 말을 들어봤는지? 유독 성적 평가에 후하다고 소문이 난 교수님의 수업을 이르는 말이며, 경쟁률이 무척 살벌(?)하다. 나도 한국에서 대학생 시절 그런 수업을 몇 개 들었는데 평균 평점을 올리는 데에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국내 대학은 상대적으로 성적 인플레가 심한 편이다. 그러나 호주에선 상황이 좀 다르다.
호주 대학의 성적 체계는 다음과 같이 나뉜다.
Guide to Grades (출처: UNSW 홈페이지)
호주 대학에서 최고 성적 등급인 HD(High Distinction)를 받기가어려운 편이다. 우리나라 대학의 A+ 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부끄럽지만 나도 HD는 한 번도 받지 못했다. Distinction을 여러 번 받았다는 것에 만족할 따름이다. 첫 학기는 한국에서처럼 필기를 꼼꼼히 하며 단순 암기 위주의 공부를 했다. 호주대학에서 요구하는 다이렉트하고 간결한 에세이 과제의 핵심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래서 겨우 Pass 한 과목이 있었다. 여담이지만 그 과목의 교수님이 한국인이었는데 개인상담을 해주시도 하셨다. 호주 대학 과제와 시스템에 하루빨리 적응하길 바란다는 응원과 함께. 만약 그때 Fail을 했다면 다시 그 과목을 수강해야 했고 학비도 더 들어가는 시간적 금전적 낭패가 있을 뻔했다. 참고로 나 같은 인터내셔널 스튜던트와 로컬(호주인)들의 학비 차이도 꽤 났던 걸로 기억한다.
3. 에세이와 어싸(어싸인먼트)에 파묻혀 보자
영어로 토론을 하는 것도 쉽지 않은 마당에 좀 더 정제된 글로 작성해야 하는 일은 또 다른 도전이었다. 말로는 문장이 완벽하지 않아도 서로 핵심을 잘 전달하면 되는 것이나, 글은 기록이 남는 일이며 아카데믹함 또한 요구되었다. 에세이라고 해서 좀 덜 가벼운 영어 일기가 아니란 말이다. 또한 호주에서 원하는 에세이 쓰기 방식에 되도록 일찍 적응해야 했다. 뱅뱅 돌려서 전체적인 그림부터 접근하는 한국식 writing 방식은 호주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논점을 벗어났다며 카운트해주지도 않더라. 대신 교수의 과제평가 시스템 또한 합리적이라 언제든 성적과 평가에 관해 re-review나 advice를 요구할 수 있다. 그만큼 성적관리와 평가에 투명하고 자신 있단 뜻 이리라.
특이한 점 한 가지 더. 표절과 레퍼런스 출처에 엄청나게 민감한 호주에서는 Plagiarism을 처절하리만큼 철저하게 강조한다. 에세이를 제출하면 자동으로 plagiarism scan을 해서 일단 거르는 작업을 한다. 표절 의혹이 있으면 심한 경우 '퇴학'으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으니 주의를 요한다.
이렇게 이런저런 학업 적응의 어려움 때문에 국제학생들을 위한 여러 가지 세미나(주로 비영어권 출신 학생들)를 학교 차원에서 지원하며 도움을 주기도 하는데 여기에도 에세이 쓰는 노하우나 가이드를 제공하기도 한다. 우리 대학원 도서관에서는 이러한 특강이 자주 있었으며 나도 첫 학기에는 적극 활용했다. 튜토리얼을 담당하는 튜터(보통 조교수)를 귀찮게 하며 에세이나 과제의 피드백을 요청하는 것도 권할만하다. 내가 그리 적극적이지 못했기에... 한국인 특유의 나서지 않는 미덕(?)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나 걱정 마시라. 필요한 순간 기지를 발휘하여 토론도, 프레젠테이션도 상당히 괜찮게 했다.
어싸라고 불리는 어싸인먼트(Assignment) 즉, 과제도 꽤 양이 많았다. 과제가 막힐 때면 과제의 criteria를 다시 한번 분석해야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아무리 노력해서 잘 쓴 과제도 논점을 벗어나버리면 가차 없이 fail을 주더라. 호주 로컬들은 어릴 때부터 질문의 논점을 파악하여 본인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말하거나 적는 연습을 해오지만 나 같은 주입식 암기의 달인은 좀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일주일 수업 시간이나 한 학기의 총기간은 한국 대학보다 조금 짧지만 강도 높은 학업에의 몰입이 지속적으로 필요로 한 호주 대학원 생활이었다.
이상으로 수업방식, 성적, 과제 등의 관점에서 한국 대학과의 차이점을 간단히 정리해봤다. (물론 이 외에도 한국 대학과 다른 점은 많다)
한 가지 단언할 수 있는 사실은, 내가 진작에 호주에서처럼 한국 대학에서 공부했으면 뭐라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만큼 문화적 충격임과 동시에 교육적인 고찰이 깊었던 시간이었다. 한국 대학과 교육이라는 비교군이 있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그 시간 동안 학업에 집중했고 고민했고 발전하며 성취감도 있었다. 끊임없는 영어토론 수업과 에세이 쓰기를 통한 영어실력 향상은 덤이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토론 수업이나 과제를 할 때 좀 많이 뻔뻔해질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