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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헬로쿠쌤 May 18. 2022

통역사 H가 말하는 역대 가장 어려웠던 통역 이야기

순수 국내파 유학생, 호주 한인교회 예배 통역을 맡다

혹시, 주일 예배 때 통역해줄 수 있니?


호주 유학 시절, 나의 셰어 메이트이자 호주 이민 1.5세대인 동갑내기 친구가 내게 물어왔다. 어린 시절 호주에 이민 온 그 친구는 외모를 제외하고는 호주 로컬에 가까웠다. 그러고 보니 외모도 누가 봐도 교포스럽게(?) 보이긴 했다. 그 친구는 내가 시드니에서 섬기던 한인교회 목사님 딸이었고 예배 통역, 반주, 음향체크 등 굉장히 많은 일을 맡고 있는, 쉽게 말해 교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호주에 온 지 겨우 몇 달 밖에 안된 내가 설교 통역을?


그런 그녀가 어느 날 넌지시 내게 교회 통역을 해줄 수 있는지 물어온 것이다. 우리가 다니던 한인교회에는 호주 현지인들은 물론, 한국어보다 영어가 더 편한 이민 2세들도 출석하던 터라, 매 예배 시 영어 통역을 제공하고 있었다. 잠시 당황했다. 내가? 난 국내파로 영어 공부한 건데? 통역은 실시간인데 못 알아들어서 흐름이 끊기면 어쩌지? 내 통역이 호주 현지인들에게 이상하게 들리면 어쩌지? 이런 오만가지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사정을 알고 보니, 친구는 과중한 교회일 감당하기 쉽지 않은 상태였고 마침 셰어 메이트였던 내가 통역사로 괜찮아 보였나 보다. 당시 나는 성실히 신앙생활하는 한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된 유학생이었고 그녀의 셰어 메이트니 눈에 띄었을 법도 했다. 호주 교포 친구들은 결정적으로 한국어가 서툴러서 통역 무리였고, 한국에서 온 워홀러(워킹홀리데이 온 사람을 이르는 말)나 어학연수생 중에는 통역할만한 수준의 사람을 찾기 어려웠을 터.


게다가 단언컨대, 교회에서의 통역은 단순히 한국어와 영어를 잘한다고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영어를 아무리 잘해도 교회를 다녀보지 않은 사람에겐 굉장히 어려운 성경적 용어와 배경이 속출하기도 하고 이에 대해 한국어와 영어로 모두 익숙해야 좀 더 수월하다.




조금 특별한 통역


그동안 한국에서 통역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적지 않았다. 전문 통역사로 활동한 것은 아니지만, 회사 업무상 해외 관계자들을 자주 만나고 소통했으며 필요시 프레젠테이션이나 통역 업무를 맡기도 했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는, '일개 신입사원, 어느 날 영어 면접관이 되다'를 참고하시길)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교회에서의 통역은 비즈니스 통역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게 다가왔다. 다시 말해 여러모로 무척이나 긴장되고 부담스러웠다. 결국 시드니의 그 교회에서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통역 봉사를 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교회에서의 통역, 뭐가 다를까?


마치 이 일이 미리 예견되었던 것처럼, 꽤 오랜 시간 영어설교를 들어왔다. 워낙 영어에 대한 관심이 많기도 했고, 개인적으로 성경 이해에 대한 지경 혹은 이해를 넓히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통역봉사에 대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긴 채로 시작하게 되었다. (돌이켜 보니 뭘 잘 모르고 자만했었다)


통역봉사를 하기로 한 나는 주일 예배 하루나 이틀 전, 예정된 설교 말씀에 대한 성경구절과 요약본, 주보 등을 전달받았다. 미리 준비해야 마음이 편한 성격 탓에 철저하게 통역 준비를 하고자 했다. 그러나 갑자기 설교 내용이 바뀌거나 즉석에서 예정에 없던 성경구절을 인용하는 일이 벌어질 때는 진땀을 빼곤 했다. 그런 일은 꽤, 아니 거의 매번 있었던 기억이다. 그래서일까? 완벽하려고 하던 모습을 좀 내려놓고 편안한 마음으로 임하려고 했다. 결국 끝까지 그게 잘 안되었던 게 문제지만.


교회에서의 통역 봉사가 업무도 아니고 페이를 받는 일도 아니었지만 온전히 내 입을 통해서만 예배 순서를 알고 설교말씀을 듣게 될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하니 절대로 소홀이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업무할 때보다 더 부담감이 느껴지는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강대상 한편에 자리를 잡고, 목사님 말씀하시는 것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머릿속으로 쉴 새 없이 한국어에서 영어로 말을 바꾸고, 더 적당한 표현을 찾고 성경 용어를 기억해내는 고도의 정신노동(?)이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예배시간 내내 얼굴이 화끈거리고 온 신경과 시선이 예배 상황과 목사님 입을 향해 있었더랬다. 그래서인지 통역을 하고 나면 그렇게 허기가 지더라. 에너지를 많이 게 분명하다. 통역봉사를 하겠다고 별 고민 없이 수락한 그때의 내가 참 용감하고 대단해 보이기도 하다.




영어예배 통역, 나의 은사일까?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사(gift)'라는 개념이 있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란 뜻을 갖고 있다. 달란트라는 말로 통용되기도 하는데, 쉽게 말해, 내가 잘하거나 갖고 있는 재능을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 쓰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런 맥락에서 나의 영어 통역 봉사도 은사라고 보인다. 적어도 호주 유학시절 당시에는.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영어 통역 봉사는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지만 혹시 또 아는가? 통역이라는 수단을 통해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생각보다 속히 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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