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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징니 Feb 23. 2017

나의 세상은 보편이 아니다

책 [환대받을 권리, 환대할 용기]를 읽고 쓰다



'저상버스'라는 단어를 처음 봤을 때는 그게 무슨 버스인지 몰랐다. 저상버스가 뭐지, '저'라는 걸 보니까 뭔가 낮다는 것 같은데, 천천히 가는 버스라는 건가? 저속버스? 고속버스 반대? 아니면 지하로 다니는 버스? 대충 뭐 이런 멍청한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네이버에 검색을 해보니, 저상버스란 '장애인들이 휠체어를 탄 채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오를 수 있도록 차체 바닥이 낮고 출입구에 계단 대신 경사판이 설치된 버스'라는 친절한 설명이 나왔다. 아하, 그렇구나, 하고 별생각 없이 살고 있었는데 유럽여행을 다녀오고 나니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유럽 국가들에 비해 우리나라 대중교통에서는 장애인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왜일까? 유럽이 유달리 장애인들이 많은 곳이고, 우리나라는 별로 없는 곳이라서? 


그럴 리가. 우리나라에서 장애인들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일 뿐이었다. 다시 말하면 사회구조적으로 그 존재가 '지워진' 사람들. 비장애인들에게는 습관적 일과일 뿐인 대중교통 이용, 외식 같은 일에도 많은 장애인들은 수십 배의 힘을 들여야 한다. 모든 기준이 비장애인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엄밀히 존재하는 사람들임에도 그들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턱없이 미비하다는 것이 그들의 존재가 지워져 있다는 증거다. 장애인뿐만 아니라 성소수자를 비롯한 여러 소수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존재를 지우는 일은 너무도 쉽다. 흔히 묻는 남자친구/여자친구 있냐는 질문은 레즈비언/게이의 존재를 지우고, 철저히 서양인 관점의 유색인종이라는 단어는 그 안에 속한 다양한 인종의 존재를 지우고, 심도 깊은 고민이 없는 깨끗한 도시 만들기 계획은 노숙인의 존재를 지운다. 


그래서 소수자들은 목소리를 내려한다. 사회 내에서 어떤 집단이 낼 수 있는 목소리의 크기는 곧 그 집단의 위치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신문, TV, 인터넷 등의 온갖 매체를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시스젠더 헤테로 중년 지식인 남성'임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퀴어문화축제나 장애인들의 버스 저지 시위 등은 모두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소수자들의 노력이다. 가시화되어야 논의가 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꼭 저렇게 과격하고 불편하게 해야 하냐, 지지하고 싶다가도 지지를 철회하게 된다'라고.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될지도 모르겠는 개소리다. 본인이 헤테로섹슈얼이고 비장애인이라는, 순전히 우연히 얻은 기득권이 저따위 소리를 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준다는 오만한 발상이다. 


자기 인식과 세상이 일치하면 삶이 편안하다.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은 아무런 갈등이 없으니 의문을 품을 필요도, 문제를 제기할 필요도 없다. 이 말은 곧, 무신경하게 살면 편하다는 뜻이다. 이렇게 살면 의문을 제기하고 불편함을 드러내는 사람을 이해하기 힘들어진다. 하지만 나의 세상은 결코 보편이 될 수 없다. 우연히 얻은 기득권을 내려놓고,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알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드러나지 않은 목소리들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용기 있게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결국 ‘우리’라는 이름으로 ‘함께’ 살아야 하는 영원한 타자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수많은 사람들을 유령처럼 여기며 스쳐 지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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