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폭력대화의 수업 중에서도 엄마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계속 나왔고, 하루는 엄마에 대한 ‘비난’을 모조리 써보는 과제가 주어졌다.
나는 질문했다. “선생님, 저는 사이가 좋은데 뭘 쓰나요. 전 불만이 없어요.” 하니,
본인에 대한 비난을 써 보라고 권하신다. 쓰다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나의 모습을 쓰는 건지 엄마의 모습을 쓰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은 다 엄마와 얽혀있었다.
그렇게 나는 엄마의 옷을 찾았다.
엄마의 키는 163, 나는 167, 엄마의 몸무게는 61 나는 63, 엄마의 발은 255 나는 250
딱 그만큼 불편했다. 나는 엄마의 옷을 입고, 부츠를 신고 정말로 그렇게 살았다.
내 옷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비슷하니. 자크가 조금 잠기지 않아도, 발이 조금 헐거덕 거려도, 깔창을 깔면 되었고, 자켓을 입으면 되었다. 불편하지 않았다.
엄마는 23살 어린 나이에 나를 낳았다. 엄마는 그럴 ‘수’ 밖에 없었음을 안다. 그 시절, 8살 차이 나는 장남인 아빠와 결혼 해 시부모님을 다 모시고, 줄줄이 딸린 삼촌들과 한집에 살며 한 끼를 5~6번 차렸다고 하니 말 다 했지 뭐. 나를 등에 업고 할머니와 함께 일을하며 살았고 내가 유치원 때 즈음 분가를 했다. 아빠는 사업을 하셨고, 엄마는 그 일을 도왔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엄마는 우리에게 늘 예쁜 옷을 입히기 위해 해마다 아울렛을 가서 김민제 아동복을 사 입히셨고, 모든 사진 속 나는 투피스와 워커, 남동생은 무스로 한껏 2:8머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 형형색색 갖은 야채와 고기가 담뿍 들어있는 유부초밥, 고기가 식지 않을 돌판에 담긴 직접 만든 함박스테이크, 동짓날이면 학원 선생님들까지 다 챙겨주는 동지팥죽 등등 엄마는 ‘사랑한다’라는 말을 그렇게 표현하셨기에 나는 엄마의 사랑을 알뜰히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맞다. 사랑이 맞다. 엄마의 사랑 표현이었다. 그러다가 엄마가 아빠의 일을 본격적으로 돕기 시작하면서 돌판 위 함박 스테이크는 3분 미트볼로 바뀌었다. 레토르트 식품의 특유의 맛이 눈으로도 보일 지경인 미트볼이 IMF를 견디게 해 주었기에, 본격적으로 엄마는 일하시기 시작했다.
엄마는 결혼을 여성의 ‘뒤웅박’ 팔자론을 펼치시며, 인생에서 한 번 있는 아주 귀한 중요한 시점임을 여러 번 이야기하셨다. 나의 무의식에도 잠재하는 걸 보니 엄청난 주입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선을 본 적도 있었고, 마담뚜 아주머니들에게 전화도 여러 번 받아보았다. 이 또한 엄마는 본인의 결혼 실패에 대한 ‘너만은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투영되셨음을 안다. 부모님의 이혼은 나에게 한 번도 정서적 타격을 주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엄마가 그만큼 아빠의 몫을 혼자서 다 정말 완벽하게 오히려 더 많이 해내셨기 때문이리라. 돌이켜 엄마를 바라보면 지금의 나와 비슷한 나이에,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날들이었을 텐데, 우리에게 눈물 한번 보이지 않았다. 그랬기에 아빠의 잘못이 그렇게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심지어 그 시절 나는 엄마와 아빠의 이혼이 진행되는 과정도 모르고 고등학교 전교회장 선거에 나가며 최고의 성취를 맛보며 살아가고 있었다. 엄마의 힘든 암흑 속, 내가 타격받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에 엄마의 울음을 멈출 수 있었고, 나에 대한 기대를 더욱 걸 수밖에 없었음을 글을 쓰는 이 순간, 알아차린다. 나는 그 시절 엄마의 ‘빛’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미션으로 그 빛이 세상으로 나가 자기 일을 가지고 놓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며, 경제적으로 안정된 집에서 돈 걱정 없이 살아갈 결혼을 시키는 것이었음을.
사립 초등학교를 보내고 싶을 정도로 교육열에 관심이 많았던 엄마는 우리를 적극적으로 학원으로, 유학으로 여러 시도를 하셨다. 엄마는 그 시절 고등학생 홈스테이 교환학생을 권하거나, 수능이 별로였을 땐 체대 과외를 붙여 여대 체대를 제안하거나, (향후 요가학원을 그 당시 생각하셨다고) 반수를 할 때도 차라리 미국 유학을 하러 가라고 하거나... 여러 가지 제안을 하셨다. 나는 하. 나. 도 듣지 않았다. 엄마의 말에 다 반기를 들었다.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심지어 선을 봐줘도 이 남자는 이래서, 저래서... 그렇게 반기를 들었다.
그런 나의 수많은 반기에 스스로 항복하게 된 것은, 결혼이었다. 반대하는 결혼이였다.내가 엄마 말을 듣지 않아서, 이렇게 행복하지 않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결혼 준비의 기간은 눈물로 하루를 시작하고 눈물로 끝나는 하루하루들이었다. 엄마는 그 힘든 시절에도 버텨냈던 눈물을 나에게 보였고, 나는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의 빛이 꺼졌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신혼은 슬픔이였다. 회사에서 10분이면 가던 집이, 10분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 버스정류장에서의 원망의 시간이였고, 어그 부츠 안의 발톱으로 다 느껴지는 추위였고, 임산부를 배려해주지 않는 청년 위에 서서 흘린 눈물이었다. 매번 아파트 단지를 들어가는 돌계단에서 흐느끼며 자책했다. 왜 이리 멀리 시집왔냐며.. 엄마는 신혼집을 올 때마다 항상 말씀하셨다. 분당에 살아야 하는데, 서울로 가야 하는데...
“내가 널 서울에서 그렇게 키웠는데... 넌 이곳 생활이 편하니”
그렇게 몇 년을 듣고 살았으니, 난 그곳에서 편안할 수 없었다. 편안하면 안 되는 거였다.
2016년 엄마를 모시고 갔던 여행이었다. 술을 마시고 난 후 늘 반대의 길을 가는 사위에게 이야기를 시도한다. 분당이나 서울에 대해. 남편은 단호하다. “장모님, 저는 미래의 저희도 중요하지만 지금 30대의 와이프와 저의 삶이 너무 중요합니다. 무리하면서까지 옮기고 싶지 않습니다.” 그 뒤로 말씀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2018년, 다른 제안으로 돌아온다. 본인이 사셨던 서울의 집을 우리에게 파시겠다고 한다. 그 가격 그대로. 솔깃했다. 2016년보다 2년 더 지나 조금 더 나아졌고, 돈을 보는 우리의 시각도 조금은 달라졌다. 그래서 인수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인수 과정에서도 남편이 오른쪽이라면 엄마는 왼쪽을 가리켰고, 나는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쩔쩔매며 남편에게도 화를, 엄마에게도 짜증을 내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러다가 2019년, 5월 마침내 엄마의 옷을 알게 되었다.
결국 서울 집의 인수 과정을 다 마치고 기존 집을 팔며 이사 준비를 할 때 엄마가 가족 함께 (남동생 포함) 있는 곳에서 이야기하신다.
“너희 집 많이 올랐더라 집 팔면 1억 줄 수 있지? 그 집 동생한테 주려던 거 너네한테 팔았으니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너무 당황스러웠다. 해줄 수 있고 없고 보다 엄마의 말투에 화가 났다. 꼭 저렇게 말을 해야 하는 걸까. 남편의 얼굴을 보니 뻣뻣하게 굳어있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마주쳐진다. 처음으로 남편이 보였다. 엄마 앞에서 얼굴 굳어서 맘에 안 드는 남편 대신, 안쓰러운 남편이 보였다. 그제야 나는, 우리 가정을 최우선으로, 부부 중심 가족을 외치던 남편이 보였다. 차에서 오는 동안 말없이 손을 잡았다. 남편은 흠칫 놀란다. 계속 아내가 뭐라고 하겠지. 내가 표정 관리 안 해서 싸우겠구나... 등등의 생각을 했다고. 그런데 내가 꺼낸 말은 “ 당황했지.” 였다. 남편은 그 말을 듣고 정말 당황했다. 집에 돌아와 아이들을 눕히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돈 문제와 그에 엮인 이야기들. 모두가 우리 가족을 위해 가고 있던 길이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며 이야기한다.
“여보, 난 이 이야기를 어제도 했고, 몇 달 전에도 똑같이 이야기했어.”
문득, 빛줄기가 스친다. 나, 남편 너무 잘 만났구나.
맞아, 나는 남편의 이런 뇌의 섹시함을 좋아했지. 나 남편 믿음직스러워서 좋아했지.
나는 다음날 편안하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우리는 지금 상황에서는 돈을 드릴 수 없어요. 나중 나중에 집을 팔고 현금이 생기면 우리가 당연히 고마움을 표현할 생각이지만, 현재는 우리 가족의 계획된 자금흐름이 있으니 드릴 수 없습니다.” 정확하게 표현했고, 그 후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엄마의 감정은 엄마의 것임을 알자 편안해진다. 전화를 끊고 나는 아무렇지 않게 일상생활을 하는 나를 발견하고 축하했다. 정서적 독립의 첫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