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경기도
마흔 살 글쓰기의 시작은 치유와 정리였다. 아팠던 과거를 뒤로하며 정리하고자 쓰기 시작했다. 스스로 드러내 놓으며 위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말로 괜찮아지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가장 꺼내기 힘들었던 열 살 소녀의 아픔에 대해 꺼내어 볼 차례다.
경기도의 한 소도시. 5~6년쯤 된 1500세대 아파트에서 국민학교를 입학해 학창 시절을 보냈다. 한동네 안에 1,000여 세대가 넘는 아파트 단지가 열 단지가 넘던 나름 90년대 신식도시였다. 학교 뒤에는 다른 1500세대의 아파트 단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쾌적하고 안정감 있는 동네였다. 엄마가 최선을 다해 골랐을 것이다. 아빠의 직장에서 많이 멀지 않으면서, 깨끗하고 안정감 있는 동네. 그러다 보니 학교는 과밀이라 1학년 입학 당시 오전 오후반으로 나누어 학교에 다녔고, 한 학기가 채 끝나기도 전 같은 반 아이의 이름을 다 알기도 전에 반은 다른 학교로 나뉘었다.
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우리 집에서 대략 여섯 동을 지나고 길을 두 번 건너야 했다. 학교 바로 옆에는 상가가 있었는데, 문구점과 신호등 사탕 아폴로 등등 불량식품들이 가득한 슈퍼와 나의 소녀 감성을 한껏 취하게 해 준 책 대여점이 있었다. 책 대여점은 내가 4학년쯤 생겼는데, 깨끗하고 하얗게 인테리어가 되어있어서인지, 예쁜 대학생 언니가 아르바이트하고 있어서인지, 책이 좋아서였는지, 가장 자주 들리며 좋아했던 공간이었다.
그곳엔 핑크색의 하이틴 로맨스 소설인 신세대 x 문고 책이 한 책장 가득 메워져 있었기에, 200원을 들고 가서는 한 권을 빌려오면 3박 4일의 대여 일자가 무색하게도 1박 2일 만에 들리곤 하였다. 가끔 용돈이 여유 있을 때엔 1000원, 혹은 2000원을 미리 넣어두고 결제하는 선결제 방식을 사용하기도 했다. 연체가 되면 100원씩 벌금이 있기도 했는데 단골은 슬쩍 봐주기도 하고, 신간이 나오면 먼저 빼주기도 했던 사람냄새 가득한 책 대여점이었다. 방학 때에는 하루에 두 번씩 가서 빌린 적도 많았다. 그렇게 자주 가서 말랑말랑한 사랑을 꿈꾸게 만드는 x 문고를 모두 섭렵하고 자연스럽게 더 환상적인 만화책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당시 우리나라 만화계의 르네상스라고 불릴 정도로 다양한 작가들의 만화책이 많았다.
『은비가 내리는 나라』, 『아르미안의 네 딸들』, 『오디션』 등등 매일 읽어도 질리지 않을 만큼의 만화가 가득했고, 윙크나 밍크 등등 월간지 만화책도 많았다. 그리고 『란마』, 『드래곤 볼』,『닥터 슬램프』 등 일본의 만화책도 대거 유행했던 때였다.
x 문고를 섭렵했던 저력으로 만화책을 읽어 내려가던 중, 일본 만화 작가인 야와자 아이의 『천사가 아니야』라는 만화책을 접하게 되었다. 새로 생긴 남녀 공학 고등학교에서 벌어지는 학생회 아이들의 에피소드들이 주된 내용이었는데, 밝은 주인공 여자아이의 성격과 학생회의 끈끈함, 우정과 사랑, 그리고 친구들을 위해 진심으로 대하며 지내는 모든 장면이 내겐 꿈으로 다가왔다. 환상 속의 사랑을 꿈꾸는 로맨스 소설과는 달랐다. 환상이 아닌 현실에서 이루고 싶은, 꿈을 찾게 만들어 주었다. 만화 속의 주인공이 내가 될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안될 것 같았다. 희망은 생겼지만 자신이 없었고, 꿈은 있었지만 터전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