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가면, 괜찮아질까요? #2

10대 소녀에게 없던 용기

by 엄마 안녕


90년대 국민학교에서는 매일 아침 국민체조를 하고 햇살이 내리쬐는 운동장에서 구령대 위에 계신 교장선생님의 훈화 말씀을 들었다. 아니 서 있었다. 그러다 가끔 작고 마른 아이들은 한두 명씩 쓰러지곤 했다. 나도 쓰러지고 싶었는데 단 한 번도 쓰러진 적이 없다.


국민학교 입학 전부터 키가 컸던 나는, 참 쑥스러움이 많고 부끄러움이 많았다. 눈에 띄는 것도 싫었고, 줄반장도 싫었고 발표도 싫었다. 키만 커서 제일 뒤에 서 있던 나의 초등학교 시절은 조금은 슬프고 조금은 어두웠다.


조용히 학교만 다니던 국민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긴 금발에 파란색 눈동자, 커다란 입. 줄리아 로버츠보다 정말 예뻤던 그 혼혈인 친구와 친해지고 싶었다. 말은 많지 않았지만, 친구가 되고 싶어 이런저런 노력을 했던 것 같다. 그러다 친해지게 되었고 참으로 행복했다. 순간순간 진심으로 대했다. 그러다 순식간에 정말, 한마디의 말로 그 아이에게 미움을 사게 되면서 나는 움츠리게 되었다.



지연 : 나 정말 줄리아랑 친해지고 싶어.

나 : 아 그렇구나~~~!!

(난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나: 줄리아~지연이가 너랑 친해지고 싶대.

줄리아: 어 그래~? 친하게 지내볼게.


나: 지연아! 줄리아가 너랑 잘 지내볼 거래!

지연: 정말~? (환희)

줄리아: 야!!! 그걸 왜 네가 말하니?

(나는 기분이 나쁠 줄 생각하지 못했는데,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다.)



그날 이후, 눈이 정말 예뻤던 그 아이는 4 분단 맨 앞자리에서 2 분단 맨 끝자리에 앉은 나를 그 크고 예쁜 눈으로 쉬는 시간 내 내 째려보았고, 예쁜 목소리로 통화하며 하지 않아도 될 미운 말들을 쏟아부었고, 친할 때 빌려주었던 배드민턴 채를 다 끊어놓고는 무릎을 꿇고 가져가라 말했다. 나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무릎을 꿇었다. 그 친구와 동생들이 보는 현관문 앞에서. 그러고는 문을 닫혔다. 나는 끊어진 배드민턴 채를 안고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밉지 않았다. 다시 친해지고 싶었으니까. 친했던 그 순간들이 너무 좋았으니까. 선생님이나 엄마에게 이야기하면 돌이킬 수 없을까 봐 혼자 끙끙 앓았다.


말 한마디를 했다가 미움받으면 어쩌나 싶어 모든 행동과 모든 말에 싫다고 말하지 못했다. 과외가 있어서 친구들이 우리 집에 못 오는 상황에서도, 친구들이 오고 싶어 하니 과외선생님에게 연락해 취소했고, 친구가 그 당시 할아버지가 일본에서 사 오신 귀한 워크맨을 빌려 가서 잃어버려도 물어내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하나도 괜찮지 않은데, "괜찮아."라고 했다.




친구가 전부였던 중학생 나이여서 그랬을까. 모든 생활은 친구의 사랑을 받기 위해 애를 쓰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엄마도 일을 시작하던 시기였기에 나는 본능적으로 더 괜찮아지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당시 교환 일기가 유행이었는데 ‘진정한 친구’를 찾겠다고 몇 명과 교환 일기를 썼는지 모른다. 공부는 안중에도 없었다. 뜯지 않은 빨간펜과 학습지들만 쌓여갔다. 오로지 친구들의 사랑을 받고 싶었다.


그 시기에 엄마는 이사를 결심하시고는 이사를 무척 반대하셨던 아빠 손을 잡고 내가 다니게 될 고등학교 세 학교를 들렀다고 한다. 세 학교 중, 두 학교에서 때마침 담배를 피우던 아이들이 많았고, 분위기가 좋지 않았기에, 엄마는 결단력 있게 “가자”라고 하셨고, 아빠도 동의하셨다.


15살이었다. 초등학교 친구들부터, 중학교 친구들까지 있으니, 가장 전학하기 싫어했을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이사 이야기를 꺼내셨을 때, 싫지 않았다. 친구들과 헤어짐이 두려운 것보다, 새로운 친구들을 사귈 때의 걱정과 기대가 더 컸다. 전학을 가기 전 마지막 등교 날은 소풍날이었다. 미리 사두었던 새로운 신발과 가방을 메고 마지막 등교를 했다. 소풍날 날이 좋아서였을까, 소풍날의 설렘 때문이었을까, 새로 산 가방과 신발이 가벼워서였을까. 아쉽지만 가볍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는 헤어짐을 맞이했다.


이삿날 본 엄마의 눈물은 나의 기억 속에서 처음으로 본 눈물이었다. 살기 참 좋았던 90년대 신도시에서의 생활은 그렇게 끝이 났다. 동네를 바꾼다는 것. 그것도 10년 가까이 살던 곳에서 전혀 새로운 곳으로 간다는 것. 그것도 그 동네가 대치동이라는 것. 돌이켜보면 정말 큰 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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