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에 무덤덤해지는 순간, 하이에나가 된다
태풍 이야기하는데 웃음이 삐져나오면 안돼요
귓가로 PD선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태풍이 추석 밥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한창 이야기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저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 웃었을 뿐이었다. 태풍 피해 이야기를 하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귀로 들려온 목소리는 부드럽고 단호했다.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지금 태풍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라디오를 들을 수도 있는데 웃고 있는게 말이 안 되지.' 마음 속 이성이 얼른, 선배 말을 거들며 나를 탓했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했던가. 순간 경솔했던 내가 미워졌고, 실수를 굳이 콕 집어낸 스스로가 더 미워졌다.
창피함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 숨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지만 이를 억지로 누르고 가까스로 방송을 마쳤다.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그렇게 허둥지둥 자리로 돌아오니 갑자기 마음이 타악 풀렸다. 여전히 창 밖은 비구름으로 까맸고 사람들은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 홀로 멍하니 천장을 봤다. 문득 하이에나가 생각났다. 어떤 동물의 죽음을 목도해도 아파하거나 의문을 갖는 대신, 그저 먹어치우는 하이에나.
직업 특성 상 수많은 소식들을 접한다. 특히 '안 좋은 소식들'은 거의 가장 먼저 우리 회사 사무실에 찾아온다. 처음에는 누가 누굴 죽이고, 그 속 사정이 어땠고 이런 이야기들이 너무 안타깝고 힘들어서 잠들기 전까지 생각하고 고민하기도 했다. '끙끙 앓았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이내 깨달았다. 죽고, 죽이고, 사기치고, 배신하고 이런 일들은 생각보다 꽤 흔하게 일어나는 일임을 말이다. 시간이 좀 지나면서 나는 어떤 비보가 찾아와도 태연하게 맞이할 수 있게 되었고, '어이고, 안타까운 사연이네' 하면서도 타자 위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이는 단계에 이르게 됐다. 자극이 반복되면 이에 반응하는 역치가 올라간다는데 나의 '감정 역치'는 그러니까 온갖 자극이 쏟아지는 환경에서 한껏 올라가 버린 거였다. 지인의 일처럼 가깝게 느껴지던 누군가의 비보가, 그저 어느 소설 속 이야기처럼 느껴지게 될 정도로.
타인의 사정에 무덤덤해지는 것은 비단 '안좋은 소식'에만 한정된 것도 아니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글을 쓰고 싶다고 자기소개서 등에 써 내던 사람이었지만, 그런 다짐 역시도 무뎌져 있었다. 그런 무던함은 아이러니하게도 날카로운 칼이 되어 누군가를 찔러댔다. 하지만 나는 이런 사실도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어느 크리스마스 즈음의 일이었다. 청년들이 지역의 어려운 가정 아이들을 위해 몰래 산타를 자청했다는 내용의 행사 소식을 접했다. 내가 전할 수 있는 소위 '따뜻한 뉴스' 였기 때문에 당장 취재에 착수했다. 우선 관련 기관의 도움을 받아 방문 가정을 섭외하기 시작했다. 인터뷰 질문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번에 받고 싶었던 크리스마스 선물이 뭐에요?', '이렇게 형, 누나들이 선물도 주고 하니까 어때요?'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끝내 들을 수 없었다. 가정 측에서 거절했다는 것이다. 기관 담당자는 머뭇 머뭇하며 덧붙였다. '사실은 그런 집들이 많아요. 아이들이 더 상처받을까봐, 이런 이벤트도 마냥 좋아하지를 않으시고요.. 아무튼 죄송합니다.' '사실은' 이후로 문장이 끝날 때마다 뒷통수를 맞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얼얼한 뒷통수를 만지작거리며 얼른 전화를 끊었다.
누구를 위한 건가. 이런 아픔을 들춰내는 것이, 대체 누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기 위한 글인가. 그 때 처음 자책감이 들었다. 내가 아무런 불편도 없이, 누군가의 아픔을 이야기해댔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지자체나 관련 기관의 성화에 못이겨 카메라 앞에 섰던 사람들, 머뭇 머뭇 자신의 어려움을 고백하고, 고맙다고 해야 했던 사람들이 자꾸 떠올랐다.
그 뒤로는 감히 '마음 따뜻해지는 글을 쓰겠다'며 '도움 받은 이들을 조명하는 글'을 함부로 쓰지 않았다. 대신 도움을 준 이들을 더 조명했고, 도움 받은 이들에게는 이야기만 들으려고 노력했다. 무엇보다도 내 글이 누구를 아프게 할 수 있는 건지 계속 생각했다. 그래도 상처를 준 사람에게는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반성했다. 아픔을 누군가에게 전하려면 나도 함께 같이 아파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하이에나, 그의 본성을 닮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이에나에게는 눈 앞에 하마(로 추정되는 고기)가 왜 죽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죽을 때 어떤 감정이었는지 이런 것들이 의미가 없다. 살아가는 데 별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일 것이다. 하이에나에게 그건 그저 먹이일 뿐이다. 먹는 건 본능일 뿐인데 밥 앞에서 전사를 고민할 이유가 없다. 그렇기에 그렇게 사체를 먹어치우고도 유유히 갈 길을 갈 수있다.
사람은 그렇지 않다. 누군가의 아픔을 목도하고, 이를 전달하는 일은 또 다른 아픔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비보를 듣고 전하는 일은 정말 많은 에너지가 들어야만 하는 일구나 생각한다. 무심하게 전달된 타인의 아픔이 생명을 얻어 자기 마음대로 뻗어가고, 이내 칼이 되어 누군가를 찌르는 것을 아주 고통스럽게, 자책하며 바라본다. 내가 또 실수를 했구나, 저 날카로운 건 나의 무심함 때문이다, 생각하면서.
아픔 앞에 무던해진 스스로를 깨달을 때마다, 하이에나를 생각한다.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순간 그저 먹이만 생각하는 하이에나가 된다고, 그렇게 살지는 말자고 다짐한다. 태풍이 오던 밤, 어느 하이에나는 회색 사무실 천장을 올려다보며 다시 한번 반성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