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순간을 위해서는 수많은 허드렛일이 필요하다
어느날, 새벽부터 만난 이가 다짜고짜 내게 꿈을 물어왔을 때 사실 난 좀 어벙한 상태였다. 그를 만나기 불과 1시간 전까지 강아지가 많이 나오는 꿈을 꾸다 나온 참이었다. 일명 개 꿈. 하지만 간밤에 무슨 꿈을 꿨냐고 묻는 건 아닐 것 같고....기원을 알 수없는 그의 질문은 순간 나를 순간 요동치게 했다. 평소 새벽출근을 할 때는 비행기가 자동항로를 켜듯 웃는 얼굴을 장착해두고 반쯤 잠들어 있었는데, 난기류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이랄까. 일단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질문을 되돌려주기로 했다.
"하하. 그걸 왜 물어보세요?"
질문의 의미를 명확히 하거나, 혹은 그 속의 약간의 무례함을 인지하거나.
아무튼 나름 유효타가 되길 기대한 질문이었지만 그는 빠른 걸음으로 대기실을 향해 걸어가며 혼란스러운 질문을 더했다.
"아니, 꿈이 있을 거 아녜요. 이런 '허드렛일' 말고. 원래 뭘 하고 싶었느냐고요."
뭐, 딱히 기분이 나쁘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허드렛일'이라는 단어의 부정적 의미가 마음에 훅 들어왔다. 나는 그의 뒷통수에 대고 "전 제가 꿈꾸던 일을 하고 있어요" 하고 내뱉었다. 물론 그 말은 그대로 허공에서 허무하게 사라졌다. 그는 허둥지둥 제 할 일을 했고, 유유히 갈 길을 가버렸다. 그래서 나는 해가 한창 뜨고 있는 어느 새벽, 고요한 사무실에 혼자 앉아
'허드렛일'에 대해 생각했다.
허드렛일은 '[명사] 중요하지 아니하고 허름한 일'을 말한다. 사전적인 의미를 확인하고 나니 좀 억울하다. 아니, 매일 의미있고 재미있는 정보들을 찾고, 이걸 어떻게 방송으로 전달할지 단어와 문장을 벼르고 골라서 내놓는데- 어떻게 내가 하는 일에서 '허름한 느낌' 이랄지 '중요하지 않은 느낌'이 난단 말인가. 식상하다거나, 조금 아쉽다는 평가라면 몰라도.
혹시, 새벽마다 누군가를 웃는 낯으로 맞이하고 방송이 잘 진행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허름하게 느껴졌던 걸까.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이 그게 다라고 생각한다면... 뭐, 그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출연자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열심히 웃고, 물을 뜨러 대기실 겸 분장실까지 뛰어갔다오고 하는 과정. 이 날도 '원고가 없어졌다'며 마이크를 차던 도중 뛰쳐나가버린 그 때문에 나 역시 땀을 좀 흘렸더랬다. 생각이 여기 미치자 문득 거울을 보고 싶어졌다. 아...! 거울 속에는 다크서클이 볼까지 내려온, 조금 피곤해보이는 여자가 있었다. 속상하게도 그녀는 정말 조금, 허름해보이기도 했다. 이런.
그래도 이해와 동의는 다른 문제일 터, 그의 발언을 마구 반박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자, 일단 앉아보세요. 당신이 말한 '이런 일'은 무엇이죠? 그리고 '허드렛일'이란 무엇이죠? 아니 애초에 '허름'한 건 무엇이며, 왜 그렇게 생각했다는 거죠? '중요한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은 뭐에요? 당신은 제 일의 어떤 점에 대해 주목한거죠? 그게 중요하지 않다고 본 이유는요? 기준을 세울 때마다 수없이 터져나오는 질문들을 저더러 대체 어떻게 처리하라고, 다짜고짜 '이런 허드렛 일을 하고 있느냐' 는 문장을 내뱉었나요!'
'나의 일이 허드렛일이냐', 에 대해서는 일단 내가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더이상 의미부여할 일이 아니다. 다만 허드렛일 자체에 대한 폄하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중요하고, 의미있는 일을 하는 사람일지라도 '허드렛일'을 단 하나도 하지 않는 이는 없다. 이를테면 미래 인재를 키워내는 교사도 집에서는 음식물이 덕지덕지 묻은 그릇을 닦아낼테고, 어떤 사회적 사안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는 판사도 구멍난 자신의 양말을 꿰매기 위해 허리를 숙일 것이다. 아니 설마 실에 침을 잔뜩 묻혀 바늘귀에 집어넣고 조심조심 꿰매 마무리하는 그 모습. 그런 것마저도 숭고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하지는 않겠지. 시적 표현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물론 허드렛일을 꼭 가사노동에서만 찾을 일도 아니다. 누군가를 위해 커피를 사오고, 점심 약속을 위해 식당을 예약하는 일. 손톱이 너무 길어서 작은 손톱깎기를 들고 꽤 오랜 시간 손가락에 집중하는 일. 실수로 흘린 물을 닦아내고, 쓰레기를 비워내는 일... 이런 일들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 보다는 어떤 일을 하기 위한 사사로운 과정이기에 '허드렛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허드렛일이 완벽하게 마무리되는 과정들이 모이고 모여, 어떤 중요한 순간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던가. 꽤 오랜시간 신경써서 다려낸 복장이 중요한 면접 현장에서 좋은 인상을 주듯이. 또는 깨끗해진 쓰레기통에 새로 작업 흔적을 버리며 중요한 뭔가를 창조해내듯이 말이다.
결국 나는 허드렛일 운운하며 꿈을 묻는 그에게 '허드렛일이 뭡니까', '허드렛일을 대충하는 사람 치고 중요한 일을 잘 해내는 사람 못봤습니다'하며 받아쳤어야 했을까 고민한다. 그러나 설령 그렇게 했었어도 그에게는 '다소 까칠한 여자' 정도의 느낌만 줬을 뿐, 그 이상의 의미를 전달하지는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나처럼 '허드렛일'에 대해 생각해보지도 않았을 뿐더러, 허드렛일 자체에 대해 이해를 하기 위해 나처럼 노트북을 두드려대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냥, 난기류를 난기류로 흘려보내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좀 더 중요한 일에 신경쓰기로 한다.
자, 그럼 지금부터 중요한 일을 해볼까.
아 그 전에 손톱 좀 깎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