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가항공은 잔인하다

허공에도 닿는 자본주의 법

by 미지의 세계

오랜만에 해외에서 즐거운 휴가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동수단으로 선택한 건 모 대기업이 몇년 전 야심차게 내놓은 저가항공 비행기. 몇 시간을 비행하든 밥도 안주고, 자리도 좁고, 뭐 찾다보면 여러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지만 그래도 꽤 안전하고, 덕분에 좀 더 자주 해외를 나서게 되니 평소에도 불만은 딱히 없었다.


문제는 집에 돌아오던 날, 잠을 청하며 설핏 눈을 감았을 때 발생했다. 갑자기 익숙한 조미료 냄새가 강하게 후각을 자극했다. 경험에 따르면 이건 라면이었다. 눈을 뜨니 옆좌석의 모녀가 역시나 라면을 후후 불어가며 맛있게 저녁을 해결하는 게 보였다. 정답을 맞췄지만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녀들의 탓은 아니었다. 해외에서 느끼한 음식들을 잔뜩 먹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체면이라는 걸 벗어던진다면 당장이라도 '한 입만' 하고 싶은 냄새가 옆에서 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남의 음식을 뺏어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목까지 차오른 군침을 삼키며 앞에 있는 메뉴판을 외우다시피 훑었다.


이내 이성이 식욕을 눌렀다. 라면 한 그릇에 6,7천원. 몇 분 뒤 착륙할 지상에서는 2~3천원 남짓으로도 살 수 있는 음식이었다. 배고픔을 못 참아서 원래 가격보다 더 많은 돈을 지불한다 이 비행이 끝나고 난 뒤 스스로를 자책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사실은 배가 그렇게 고프지 않은 것도 같았다. 결국 이런 저런 이유로 난 라면을 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억지로 눈을 꾹 감고는 잠을 청했다. 그 즈음이었을까, 뒷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도 들려왔다. '엄마, 우리도 시켜먹으면 안돼?' 그 때 처음 생각했다.


저가항공은 정말, 잔인하구나.


#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저가항공은 잔인하다. 자본주의의 손길이 잘 닿지 않을 것 같은 허공에서도 '돈'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비상문 옆, 맨 앞자리 등 다리를 쭉 뻗을 수 있는 공간은 돈을 좀 더 내야만 얻을 수 있고, 혹여나 캐리어에 지인 선물 등 뭔가 더 무거운 걸 담으려면 추가요금이 부과된다.


식사시간은 또 어떤가. 라면이니, 커피니 각종 음식들도 돈만 있으면 사먹을 수 있는데, 돈이 없으면 돈 있는 사람의 음식 냄새나 실컷 맡으며 비행을 이어가야 한다. 짧게는 30분 길게는 수 십시간을 한 공간에 있는데 고작 몇 천원, 몇 만원 차이로 대우가 달라진다. 돈이 없으면 별 것 아닌 것에도 서운하고 섭섭하지만 반대로 돈만 있으면 편안한 비행을 만끽할 수 있다. 결국 없는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위력을 짧고 강력하게 학습하는 공간이 바로 저가항공 기내인 것이다.


이쯤 되면 떠오르는 옛 노래가 있다.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먹으라는, '빈대떡 신사'다. 양복을 한껏 차려입은 멋진 신사가 매를 맞고 있는 걸 화자는 봤다. '왜 매를 맞고 있지?' 알아보니 신사는 돈'도' 없으면서, 무전취식을 하고 도망친 벌로 매를 맞고 있었다. '으이구, 돈도 없으면서 요리집이 다 무어고, 기생집은 또 다 무어야. 빈대떡이나 가서 부쳐먹지!' 하고 웃어제끼는 것이 화자의 태도다.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라면이나 사먹으라지~' 신사에 대한 비웃음과 풍자가 내게도, 돌아오는 것만 같다.


# 꼭 돈이 기준일 필요는 없잖아


물론 무전취식은 안된다. 요즘 자영업자들이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다. 그러나 노래를 떠올리 때마다 자꾸 양복입고 매를 맞는 그 신사에게 감정이입이 된다. 얼마나 요리집 요리가 먹고 싶었으면, 돈도 없는데 옷을 차려입고 거길 들어갔을까. 비도덕적인 그의 행동을 비난하고 체벌을 가하기 이전에 사정이라는 걸 헤아릴 수는 없었던 걸까. 마치 몇 천원짜리 라면을 고민하다 포기한 내가, 굳이 몇 십만원에서 몇 백만원은 써가며 해외 여행을 꾸역꾸역 가는 것처럼. '돈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여지를 인정하기만 해도 훨씬 더 나은 세상이 될 수 있다는 걸- 그 요리집 주방장도 저가항공 시스템을 기획한 이들도 알 텐데 말이다.


물론 저가항공라는 기본적으로 영리 목적의 사업인지라 '사람들을 배려해달라'는 말이 억지인 것을 안다. 다만 임신한 사람에게는 좀 더 넓은 자리를 제공하고, 식사 시간에 비행을 하면 간단한 빵이라도 내어주는 건 '인정'의 범위 내에서 허용 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준이 꼭 돈, 단 하나일 이유는 없지 않나. 저가항공기에 몸을 싣는 사람들 주머니 사정이란 대개 알 법한 것일텐데, 그런 사람들을 위한 항공기가 '그건 네 사정'이라며 식사시간에 돈을 지불한 라면 한 그릇만 내어놓는 것. 좁은 좌석을 제공하고, 짐을 덜 싣도록 하는 그런 상황이 아쉽다는 것이다. '돈 덜 냈으니까' 하고 스스로도 익숙해지는 건 좀 슬프고.


얼마 전 새로운 저가항공용 의자가 개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진을 보니 거의 서있는 상태에서 엉덩이만 겨우 걸칠 수 있도록 구성되어있는 의자였다. 그 의자를 들여놓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비행기를 탈 수 있게 되어 비행기값도 저렴해질 거라는데, 나는 그냥 '이제는 돈 없으면 서서 해외 가는 거구나' 삐딱한 생각했다. '이거야 원, 돈을 더 벌든지, 아니면 그냥 집에서 해외여행 가는 프로그램을 보며 빈대떡이나 부쳐먹든지 해야겠네!'하고 홧김에 결론을 내려버렸지만 뒷맛이 쓰다. 살아온 행적을 비춰본 바 앞으로도 절약하며 살게 될 것 같은데, 언젠가는 나도 돈을 아끼려는 사람들과 꾸역꾸역 서서 타는 비행기를 예약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좁고 라면냄새가 풀풀 풍기긴 했어도 앉아서 가던 그 비행기가 좋았다'고 회상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야 할지, 아니면 그냥 다리 힘을 더 키우는 게 나을지 고민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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