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사는 내내 선생님들과 함께였다. 10대 학창 시절에 만난 학교 선생님들, 20, 30대에는 취미를 알려준 선생님들이 있었고, 나보다 연령이 높은 사람들을 '선생님'이라 부르기도 했다. 엄마가 되고 나니 아이들의 선생님과도 만났다. 선생님이란 존재가 내 삶에 얼마나 많았는지, 그리고 그들이 내게 던진 말 한마디가 얼마나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는지 자주 생각했다.
'선생님'에게 받은 건 과연 무엇이었나. 애초에 선생은 뭔가 가르치는 사람이니 공식적으로는 각종 지식을 주었을 거다. 그러나 그 외에도 기록에는 남지 않는 격려와 위로, 질책과 상처도 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들의 말과 행동이 어떤 식으로든 나를 만들었다. 그래서 결국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은 선생님들이 내 마음에 무엇을 남겼는지 확인하는 것과 비슷하다.
사실 선생님의 말로 내면을 살핀 건 이전에도 몇 번 시도했던 일이다. 이전에 다른 글에서 썼던 내용은 이런 거다. 초등학교 때 만화 동아리 선생님은 "사랑해"라는 대사를 수십 가지 서로 다른 장면으로 표현해 보라고 하셨다. 그러나 초등학생 머릿속에서 사랑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었고 (물론 그때는 뭔가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결국 연인들이 사랑한다고 하는 그림만 몇 장 채웠다.
그건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교실을 한 바퀴 돈 선생님이 한숨을 쉬고 다시 말했다.
"사랑은 여러 관계에서 나타난단다. 부모와 자식, 친구, 나 자신...."
그때는 채 다 소화하지 못했던 가르침이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해를 했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사랑은 다양한 모습이다. 그냥 눈치만 챈다면 언제든 사랑에 둘러 싸인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너만의 책상을 사수하라'는 말도 있다. 고등학교 때 가정 선생님이셨던 걸로 기억한다. 나중에 누구의 아내, 엄마가 되어도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너만의 영역을 가지라는 내용이었다. 당시에는 '서재를 가지라는 것도 아니고, 고작 책상을 사수하라니 꿈이 너무 작은 거 아닐까.'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그 책상 하나 갖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은 공간은커녕 시간과 몸까지 아이들에게 다 내어주는 중인데, 아무도 손댈 수 없는 책상을 사수하는 건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사수한 책상은 화장대 겸용 책상이다. 상판을 열면 화장대가 되고, 내리면 책상이 된다. 팔을 다 벌린 것보다 작은 이곳 앞에 앉아 혼자 커피도 마시고 멍하게 있는다. 그 시간이 온전히 '나'를 만든다.
스스로가 선생님이었던 시간도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나의 모습은 어땠는지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대학생 시절,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방학 동안 교육 봉사활동을 했다. 그때 나는 이태원 특유의 이국적인 문화에 꽂혀 있었던 때였으므로 다문화 탐방이란 이름하에 이태원 탐방을 기획했다. 우리나라에선 낯선 문화인 이슬람 사원도 구경해 보고, 직접 쿠키를 만들어 여러 외국인들과 물물교환을 시도하기로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오해의 소지가 많은, 엉성한 프로젝트였다. 영어를 잘 못하는 아이들이 쿠키를 건네자, 외국인들은 그게 구걸인 줄 알았던 것이다. 성인에게도 타인에게 말 거는 건 커다란 용기인데 아이들은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기획자인 내가 진땀을 흘려가며 이끌었지만 잘 안 풀렸다. 집에 와서 거의 기절하듯 잠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놀라운 건 그 이후다. 그때 만났던 아이 중 하나가 수년 후에 성인이 되어서 나를 찾아왔다. 매번 방학마다 다른 선생님들도 왔지만 내 생각이 났다고 했다. 이제는 어엿한 사회인이 된 그 아이에게 밥도 사주고, 회사 생활에 대한 조언도 해주며 시간을 보냈다. 지금도 간혹 보고 싶다고 연락하는 인연이다. 위로든 격려든, 그에게 건넨 나의 서툰 선생 노릇이 소중한 인연도 만들었다.
여전히 내 주변에는 선생님이 있다. 말과 행동으로 가르침과 위로를 건네는 좋은 선생님, 그리고 상처를 주거나 타산지석의 사례를 보여주는 아쉬운 선생님이 있다. 그러나 나쁜 선생님은 없다. 내게 내미는 선생님의 손에 무엇이 있든, 그걸 받아 들고 마음에 굴려볼 뿐이다. 그게 무엇이든, 선생님의 말속에서 조금씩 지금의 내가 되어왔다.
이후의 글은, 나를 키운 말들에 대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