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정말 든든했잖아요

by 미지의 세계

얼마 전 육아휴직을 끝내고 회사에 복직했다. 휴직 기간을 헤아려보니 대략 4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있었다. 오랜만에 입은 불편한 옷, 잘 늘어나지 않는 셔츠와 슬랙스 바지의 감촉이 설렜다.


누구 엄마가 아닌 ㅇㅇㅇ 주임으로 사는 것. 커피를 하나 손에 들고, 뽀로로 동요가 아닌 내 취향의 음악을 들으며 출근하는 삶- 세상에는 편하지 않아도 안정감을 주는 것들이 있다. 이제 나는 일주일에 5일, 편도 1시간 20분가량의 국도 길을 경차로 달린다. 고단하지만 자유와 자존감을 만끽하는 길이다.


물론 사회인이 되었다고 엄마로서의 정체성이 사라진 건 아니다. 사실 엄마는 일상이고, 사회인은 부수적인 칭호에 가깝다. 그러므로 쉬는 날이면 나는 아이들과 여전히 이곳저곳을 다닌다. 다만 복직한 회사가 과학관이므로 이제는 휴일에도 회사로 아이들과 나들이 간다.



회사로 놀러 간다고 하면 안타까워하는 반응을 많이 듣지만 장단점이 있다. 순간순간 일해야 할 것 같은 기분만 잘 다스리면 된다. 어디에 어떤 편의시설이 있는지 다 알고 있어 원하는 대로 관람 동선을 짤 수 있다. 직장 동료들의 애정 어린 인사도 받을 수 있다.


우리 아이들은 '엄마 친구들'이라는 이모들이 왜 이리 많은지, 자기들을 왜 귀엽다고 하는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꾸벅꾸벅 인사한다. 놀러 가서 사랑받는 기분을 아이들에게 느끼게 해주는 것은 여러모로 좋은 일이다.



우리 팀에서는 서로를 '선생님', 줄여서 'ㅇㅇ쌤'이라고 부른다. 회사의 공식 명칭은 주임이지만 우리끼리는 그렇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출근한 날, 다른 선생님들과 모여 점심 식사를 하는데 문득 어떤 선생님이 말했다.


"아, ㅇㅇㅇ쌤 (나) 애기들 너~무 예뻐요. 선생님이랑 닮았어요."


그 전주에 아이들과 과학관에 왔더니 이야기 주제가 그렇게 되었다. 나 역시 ㅇㅇㅇ 선생님의 과학 해설이 너무 재미있었다고, 아이들도 로봇 댄스와 로봇 강아지 시범을 좋아했다고 화답했다. 그랬더니 로봇 강아지 해설을 했던 선생님이 말한다.


"와, 그때 진짜 선생님한테 든든하고 감사했잖아요. 선생님이랑 애들이 반응을 너무 잘해주셔 가지고. 정말 든든했어요."


그랬던가. 크게 웃으면서 지난날의 기억을 더듬었다. 꼭 나뿐만 아니라 우리 선생님들은 누군가 해설 시연을 하거나 할 때 반응을 매우 잘하는 편이다. 실제로 재미있기도 하거니와, 그 앞에 서서 이야기하는 수고로움과 어려움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해설은 기껏해야 3분~15분 사이지만, 그걸 하기 위해 수일에 걸쳐 대본을 쓰고, 고치며, 외우고, 연습한다. 그런데 아무도 반응이 없거나 하면 당황스럽고 허무하다.


하지만 그날 그런 동료로서의 의무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과학관이 워낙 넓고 다양한 공간이 있기 때문에 나 역시 그날 로봇 강아지를 처음 봤었다. 그래서 아이들과 맘껏 손뼉 쳤던 것뿐이다. 나는 관람객이었는데 그는 나를 동료로 본 것이었다. 반응하는 일도 역할이 될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느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무슨 강아지 전문 조련사인 줄 알았는데요."


너스레를 떨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우리는 잠시 햇살을 받으며 과학관을 걸었다.



이렇게 보면 팀 분위기가 가족 같이 친밀해 보인다. 그러나 사실 우리 팀 선생님들은 묘하게 서로 거리를 지키는 편이다. 일단 팀원 수가 많고 나이대도 다양하다. 매표, 안내, 상영관 관리, 해설 등 업무도 광범위하다. 그래서 몇몇 정말 친한 선생님들을 제외하고는 공통분모가 많지 않다. 만나면 반갑게 눈인사하는 정도다.


그럼에도 서로의 쉬는 시간을 챙겨주거나, 일하면서 생기는 애로사항을 쉽게 공감한다. 조금 낯설더라도 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으면 점심시간에 함께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자고 제안하거나, 어린이날 같은 휴일에는 자녀 있는 엄마가 우선 쉬라고 양보하는 식이다. 적절한 거리에서 건네지는 배려와 응원 같은 것들이 우리를 묘하게 이어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해설을 하는 선생님 앞에서 내가 먼저 웃고 박수를 치고 있으면, 아이들은 그 모습을 따라 하기도 하고 가만히 지켜보기도 한다.


집에서는 늘 엄마로만 보던 사람이 이곳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는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궁금하다. 누군가의 이야기에 먼저 반응하고 즐거움을 아끼지 않는 사람으로 기억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어쩌면 내가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도 그런 쪽에 가까운 것일지 모른다.



집에서는 엄마로 불리고 회사에서는 선생님으로 불린다. 서류 위에서는 여전히 주임이라는 직함이 따라붙는다. 하루 사이에도 몇 번씩 이름이 바뀌지만 이상하게도 크게 낯설지는 않다. 상황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 역할을 꺼내 쓰고 다시 내려놓는다.


다만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 여러 이름 사이를 오가면서 끝내 바뀌지 않는 건 무엇일까. 아이의 말을 끝까지 듣는 일, 누군가의 이야기에 먼저 반응해 주는 일, 애써 만들어낸 시간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으려는 마음 같은 것들. 어쩌면 나는 어떤 이름으로 불리느냐보다, 그 이름 사이에서 어떤 태도로 머무느냐에 더 신경 쓰는 사람일지 모르겠다.


서로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결이 비슷한 사람들에게서 자주 안정감을 느낀다. 그날처럼 누군가의 말에 먼저 웃고 박수를 치게 되는 순간들 속에서.​​​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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