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부터 겨울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호핑투어는, 보라카이 여행 코스 중 강력 추천하는 프로그램이자 추천하지 않을 수도 있는 프로그램이다. 보라카이라는 섬의 매력을 효율적으로 살펴보고 싶다면 고민의 여지 없이 선택해야 할 코스이지만 그 사이에는 돈을 쓰지 않고는 버티기 어려운시간이 배치되어 있다. 물론 이런 시간들은 호핑투어의 아주 일부분이지만 나처럼 패키지의 강제 매매 시스템을 싫어하는 관광객이라면 그 자체로 싫을테니까. 여행사도 다양하고 코스도 무척 다양하지만 오늘은 직접 겪은 기본 코스를 소개해보려고 한다.
우선 호핑투어는 아침 10시 쯤, 나무기둥들을 옆에 묶어둔 작은 배에 올라타는 것부터 시작된다. 한 배에 스무 명은 탈 수 있기 때문에 일행 뿐 아니라 그날 처음 보는 사람들이 한 조가 되어 호핑투어를 즐긴다. 우리 배에는 자그마한 배가 퐁 나와있는 금발의 남자아이 가족들이 탔고, 일본인 여성 두 명과 한국인 4명, 그리고 다수의 중국인들이 승선했었다. 가이드가 나눠준 구명조끼를 입고 문득문득 배 안으로 끼얹어지는 파도를 맞으며 가다보면 어느 순간 배가 바다 한 가운데에 와 있다. 배의 시동이 잠시 멈추고, 가이드들이 물 안경을 나눠준다. 첫 프로그램, 스노클링을 할 시간이 된 것이다.
가이드들이 건네는 물안경을 받긴 했지만 당시에는 섣불리 나서서 바다로 뛰어드는 이가 없었다.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는지('정말 바다로 그냥 뛰어들라고?') 확신하는 관광객들이 없었던 탓이다. 결국 현지 가이드들 중 한명이 몸소 맨 몸으로 바다에 풍덩 뛰어들었고 몇 몇 관광객들이 그제야 신이 나서 바다로 첨벙 첨벙 뛰어들었다. 순간 나는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구명조끼 하나를 의지하고 깊은 바다에 뛰어들 용기가 없었던 탓이다. 무엇보다도 수영을 못했다! 의지와 상관없이 떨리는 다리 때문에, 나는 두 손으로 배 기둥을 꽈악 붙잡고 있었고 포기하겠다는 말을 어떻게 말 해야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우리도 가자" 함께 여행을 온, 수영을 잘하는 친구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풍덩 바다로 뛰어들고 말았다. 그러고는 고대 신화에 나오는 사이렌보다 더 달콤한 목소리로 유혹하기 시작했다. "배 옆에 지지대 잡고 움직이면 되잖아. 너 구명조끼도 입었는데 뭐가 겁나냐?" 너는 수영 할 줄 아니까 그러는 거지. 라고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데 결정적 한방이 들어왔다. "이 때 아니면 언제 여기 바다 속을 보겠어! 들어와!" 친구는 마치 인어라도 된 듯 한껏 자유롭다는 표정으로 풍덩, 물 속에 빠져들어갔다.
지금 아니면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 그 말은 너무나 매혹적인 것이었다. 그래, 보라카이로 다짜고짜 떠나기로 한 것도 그런 생각이 아니었던가. '언제 한번 또 가보겠어' 그래서 그냥 두 눈을 감고 풍덩, 바다로 뛰어들었다. .... 아, 물론 바로 후회했다. 물에 들어가자마자 다리가 위로 들리면서 바닷물이 코와 입으로 사정없이 들이닥쳤던 것이다. 전형적으로 수영을 안해본 몸이었다. 나는 한참 버둥거리며 배 안의 사람들에게 잠깐의 즐거움을 선사한 뒤 손에 닿는 대로 지지대를 잡았고, 겨우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나를 꼬드긴 사이렌, 그에게도 내가 맛본 보라카이의 물을 마시게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는 태연히 바닷 속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검정 머리칼이 보였다. "야!!!!" 포효하는 내게 그 친구는 잠깐 고개를 들고 밑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킨 뒤 다시 첨벙 잠수를 했다. 하... 한숨을 내쉬며 그를 따라 바닷속에 들어섰다.
작은 궁전. 이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위에선 몰랐는데, 들어와보니 배가 정박해있던 곳은 색색의 산호초 탑이 있는 곳이었다. 수많은 물고기들이 어우러지는 곳, TV에서만 보던 산호초들이 한들거리는 곳이었다. 가이드들이 나눠준 밥을 먹으러 이내 몰려왔다가 다시 제 갈길을 가는 색색의 물고기들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맨 몸으로 들어가 물고기와 노니는 필리핀 가이드들을 수면 가까이서 겨우 지켜봤다. 여러모로 오묘한 경험이었다.
그 다음, 점심을 먹기 전 들른 곳은 푸카 비치. 아름답기도 하고, 사진 찍을 곳도 많은 공간이지만 굳이 2,30분씩 머물며 각종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다. 아무도 강매를 하진 않지만 권유가 상당히 많이 들어오는 곳. 무료로 제공되는 의자에 앉아 있으면 '너 해변 스타일로 머리 땋지 않을래?' 하면서 오고, '헤나 한번 해보지 않을래?' 하면서 오고, '배고프지 않아요? 여기 음식도 있고, 음료도 있는데' 하면서 메뉴판 들고 온다. 물론 즐겁게 즐기면 그만이지만, 워낙 이런 것을 싫어해서 더 격하게 거부했다. 망고주스 한 잔을 일행들과 나눠먹고 그 뒤로는 그냥 누워 시간을 보냈다.
점심을 먹고 난 뒤에는 크리스탈 코브로 간다. 온전히 관광을 위한 섬이다. 섬을 산책하듯 걸으며 자연이 만들어낸 풍경들을 감상하거나 섬 곳곳에 숨어있는 동굴을 찾는 여정으로 즐길 수 있다. 섬에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이 참 좋다. 불어오는 바람을 마주하고 있으면 갑자기 엄청 자유로워진 느낌이 든다. 타이타닉호 앞에서 팔을 벌리고 있던 여자주인공이 생각나 나도 팔을 벌려봤는데 기분이 더 좋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보라카이의 바람, 따뜻하고 포근함이 온 몸을 감싼다.
시간을 잘 맞추면 원주민들의 춤을 볼 수 있다는 것도 크리스탈 코브 섬의 매력이다. 전통 음악에 맞춰 춤도 추지만 가끔 유명 팝에 맞춰서 춤을 추기도 하고 구경하는 관광객들을 무대로 데려오기도 하는데 그 날은 한 꼬마하고 여성을 무대 위에 세웠다. 잠시 수줍어하던 여성은 거의 준 전문가처럼 춤을 추는 바람에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나도 해볼까, 하고 일행 중 한명에게 말했더니 그가 말했다. '응, 근데 나 아는 척 하지는 말고' 쳇.
보통 크리스탈 코브는 자유 관광이어서 가이드가 몇 시까지 만남의 광장으로 오라고 하고는 풀어놓는데, 혹시나 우리 일행을 놓고 갈까 겁이 나서 약속 20분 전부터 만남의 광장에 서 있었다. 처음 섬에 도착해서 돌아다닐 때는 몰랐는데, 해변과 가까이 있는 만남의 광장에 서 있자니 관광객을 태우고 집에 가려는 배들에서 나는 기름 냄새와 뱃고동 소리가 요란스러웠다. 섬에 들어오지는 않고 배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필리핀 사람들에게는 이 요란스러움이 보라카이겠구나, 생각했다. 크리스탈 코브까지 돌면 대략 호핑투어 시간이 끝난다. 출발점인 화이트비치까지 돌아오는 시간, 긴 여행 후 집에 가는 길이 그렇듯, 문득 문득 배 안으로 들어오는 파도를 맞으며 가는 길이 유난히 길고 꿈 같이 느껴졌다.
보라카이의 기억을 마무리 하기 전, 보라카이에 대한 단상을 정리하고 싶다. 보라카이는 기본적으로 자연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지만, 길 사정은 전혀 아름답지 않다. 문득 문득 음식물 쓰레기 냄새가 나고 좁은 길을 트라이시클이 잔뜩 메우고 가고 있어 매연도 심하다. 케어해주는 가이드가 없다면 우리 일행은 섬 안으로 들어오는 길이나 밖으로 나가는 길에서 한참 헤맸을 것이다. 무질서 속 질서, 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이다. 관광객이 오래 머무는 화이트비치와 그렇지 않은 곳은 격차가 꽤 크다.
길은 그렇지만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엄청 친절하고 착하다. 하루는 한국 다이소에서 사간 방수팩이 말썽을 부려서 화이트비치에 서서 낑낑대고 있는데,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필리핀 상인이 다가왔다. "난 안 살 거라고!!" 격한 거부를 하는 내게 급하게 양 손을 흔들어보이던 그는 내 방수팩을 달라고 해서 뚝딱 고쳐줬다. 방수팩을 건네며 활짝 웃는 그에게 너무 미안해서 나는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그 뿐인가. 호텔 안 팎에서, 해변가에서 만난 필리핀 인들은 기본적으로 엄청 친절하다. 서비스업이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서비스 이상으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려는 인상을 몇 번 받았었다. 감사하게 생각한다.
기억을 되살리느라 여행기를 남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보라카이는 기본적으로 좋은 겨울 휴양지다. 힘들거나 어려운 건 하나도 없어서 나이가 좀 더 들어도 올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온이 따뜻해서 마음이 절로 여유로워진다. 물론 한국 공항에 내리자마자 몸을 스며드는 한기 때문에 그 여유는 순간 잊혀지지만. 따뜻한 바닷가에서 맥주를 마시며 바라보는 노을. 바닷 속 화려한 풍경을 만끽하고 싶다면 보라카이가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