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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지의 세계 Jul 01. 2018

그렇게 서로 쌓여간다

'건축'에 대한 단상


 사람들이 가장 오랜 시간 머무는 건축물은 ‘집’이 아닐까 생각한다. 타지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2년째 할아버지 댁에서 살고 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큰 유리창으로 환한 햇살이 들어오는 곳이다. 나는 ‘우리 집’ 공간 중에서도 특히 이 거실을 무척 좋아한다. 기본적으로 탁 트여 있다. 창 밖에는 언제 봐도 질리지 않는 자연 풍경이 펼쳐져 있다. 물론 앞 동의 아파트가 살짝 보이기는 것이 아쉽긴 하다. 그러나 도심에서 이 정도 풍경이면 꽤나 준수하다고 생각한다. 눈이 잔뜩 쌓였을 때 하늘색과 초록색, 하얀색의 대비는 정말 완벽하기 때문이다. 비가 원 없이 내릴 때는 물기를 머금은 나뭇잎 하나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나는 집에서 뒹굴 기회만 있으면 거실로 나온다. 일단, 분위기가 너무 좋으니까!


 이 외에도 거실에서 만끽할 수 있는 즐거움은 사실 무척 많다. 달달한 믹스 커피를 타 마시며 책을 읽을 수도 있고 푹신한 이불을 꺼내와 TV를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매력적인 공간에 최근 새로운 즐거움이 또 생겼다. 바로 거실 탁자에 붙어있는 작은 쪽지를 읽는 것이다. 이제 대학에 들어가는 사촌동생을 위해 할아버지가 쓴 글인데, 짧고 간결하다.


 ㅇㅇㅇ, 어디 대학 무슨 과 합격! 하이팅!


..... 가만, ‘하이팅’이라고?  


 외래어 표기법에 맞지 않는, 어색한 단어 ‘하이팅’을 보고 처음에는 고치려고 했다. 맞춤법에 민감한 편이어서다. 그런 글자가 눈에 띈 이상, 제대로 써놔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몇 번 들여다보고 나서는 굳이 고치지 않기로 했다. 그 자체로 충분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과묵한 우리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건네어 보는 어색한 사랑의 표현이랄까. 매일 쪽지를 보며 기도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알고 있어서 더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하이팅’, ‘하이팅’... 나는 그 쪽지가 여전히 뭔가 어색한데도, 자꾸 마음 한 쪽이 따스해지는 희한한 경험을 한다. 이를테면 내내 별 말 없던 아버지가 문득 ‘건강 잘 챙겨’라고 메시지를 남겨놓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무덤덤한 듯, 그러나 은근히 속으로 앓던 마음을 슬쩍 내놓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면 고기 먹는 날 항상 함께 상에 올라오는 명이나물이나, 출근 전 식탁 위에 올려져 있는 찐 계란, 퇴근하고 나면 따뜻하게 데워져 있는 내 방도 마찬가지다. ‘우리 집’에는 내가 좋아할 법한 것들이 ‘하이팅 쪽지’처럼 집안 곳곳에 놓여 있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것들이 단 하나도 없는데도 말이다.   


 그런 마음들을 문득 발견하는 날이면 나는 다시 그 공간을 뭔가로 채워 놓기 위해 노력한다. 이를테면 생신을 축하하는 손 편지를 할머니 책상 위에 올려놓거나, 남몰래 설거지를 해놓는 행동을 통해서다. 마치 내가 떼어낸 사랑을 다시 그 공간에 채워 넣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문제는 어릴 적엔 몰랐는데, 커 갈수록 자꾸만 ‘하이팅 쪽지’가 곳곳에서 눈에 띈다는 점이다. 어쩔 수 없이 그걸 떼어내고, 마음에 붙인 뒤, 다시 열심히 채워 넣고 있다. 그게 우리 집의 암묵적인 룰이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집도 채워넣고, 또 할머니의 마음을 받아서, 다시 할아버지의 마음으로 채워넣는다. 건축물과 사람은 이렇게, 서로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온기와 마음을 천천히, 함께 쌓아간다.  




 그러고 보면 서로 뭔가를 함께 쌓아간다는 점 외에도, 사람과 건축물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다. 우선 어떤 목적을 가지고 공간을 만든다. 건축은 ‘사람이나 물품 따위를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벽돌 따위로 쌓아 올리는 행위’를 일컫는다. 즉 건축물은 사람이든 물건이든 뭔가를 채워 넣기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 이건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은 흔히 마음에 품은 것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곤 하기 때문이다. 신념을 품으면 그렇게 살아가려 하고, 좋아하는 이를 품으면 그를 위해 모든 것을 다하는 식이다.  


 차이가 있다면 사람은 세월에 따라 내부의 크기가 유동적으로 변한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어릴 적 ‘나’밖에 없던 내부 공간은 시간과 경험을 통해 조금씩 넓어진다. 이 넓어진 공간에 ‘타인’을 포함한 많은 것들이 들락날락 한다. 옛말에 이순(耳順)’, 즉 60세가 되면 어떤 말을 들어도 화가 나지 않는 지경에 이른다고들 한다. 60년이나 쌓이면서 온갖 것들이 마음에 들락날락한 덕분에 초연해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어린이부터 노년까지 우리는 스스로를 쌓아간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도 있다. 외부의 시선, 욕심, 걱정 등에 치이면서 결국 ‘나’ 혼자 들어가 있기도 벅찬 공간을

갖는 경우다. 흔히 ‘마음에 여유가 없다’고들 하는 상태가 바로 이 상태다. 뭔가를 넣기에도, 빼내기에도 너무 많은 것이 꽉 들어찬 순간. 그런 시점까지 되면 이미 그 어떤 것으로도 여유가 생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좋은 사람을 만나도, 여행을 가도 해소되지 않는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하나.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기쁨이’는 자신의 주인 ‘라일리’가 항상 착한 아이로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슬픔’이의 방해로 ‘라일리’는 혼란스러워 하고, 슬퍼하며, 부모님에게 반항한다. 부모와 사이가 멀어지고, 친구들과 싸울 때마다 ‘라일리’ 내면에 있는 ‘가족’,‘친구’ 건물은 빠르게 붕괴된다. 그런데 영화 말미에 ‘기쁨’이가 ‘슬픔’을 인정하는 순간, 그러니까 ‘라일리’가 애증의 감정을 배우는 순간 무너졌던 건물은 더욱 화려하게 다시 세워진다. 어릴 적 세웠던 내면은 붕괴되고, 더 성숙한 내면이 다시 세워진 것이다.  


 

 여기서 힌트를 얻는다. 꽉 들어차버린 내면을 무너뜨리고 새로 짓는 것이다. 영화 속 ‘라일리’는 사춘기를 맞이하면서 내면의 변화를 겪었다. 그런데 흔히 사춘기라 부르는 시기는 원래 ‘나는 누구인가’, ‘이건 내가 원하는 삶인가’ 따위의 자아 성찰을 하는 시기다. 즉, ‘나는 누구인가’, ‘이 삶이 나의 삶인가’와 같은 질문으로도 충분히 내면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파괴하고 다시 짓는 과정을 반복하다보면 어느덧 요령도 생기고 좀 더 안정적으로 보수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마음을 수백번 무너뜨려도 남겨뒀던 것들은 다음 보수 때 마음에 미리 배치해놓으면 된다. 그러면 그 외의 것들은 내보내는 것이 수월해질 테니까 말이다. 그러고보니 사람과 건축물에는 ‘무너진다’는 서술어와 잘 어울린다는 공통점도 있다.  




 다시, 우리 집 거실에 앉았다. 눈으로 구석구석 새삼스레 공간을 훑어본다. 기억을 더듬어, ‘우리 집’을 구성하는 것들 중 변해온 것과 변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더 나아가 나를 구성하는 것 중에서도 변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고민해 본다. 마음을 수없이 무너뜨려야만 했던 순간과 다시 세웠던 순간들을 기억해본다. 나는, 우리는, 그리고 우리가 머물렀던 이 공간들은, 자꾸만 서로 뭔가를 주고 받는다. 그렇게 서로 무너뜨리고, 다시 쌓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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