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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지의 세계 Mar 09. 2020

이름으로 나를 불러줘

존재를 부르는 주문

 우연히 TV에서 아주 감동적인 영상을 봤다. 어느 프로그램 오프닝이었는데, 몇몇 개인들의 이름이 눈부신 가을 배경 위에 떠오르고 있었다. 이어진 화면은 이름의 주인인 당사자가 나와 자신의 이름 뜻을 말하는 거였다. 내 이름을 예로 들면 먼저 미,지, 에 담긴 뜻을 말하고, (“아름다울 미, 지혜로울 지”) 거기에 담겼을 작명자의 소망(“아름답고 지혜롭게 살라는 거에요. 할아버지가 지어주셨어요.”)과 뒷이야기를 이야기하는 식이었다. 개인들의 이름 뜻을 들을 때마다 자꾸 뭉클해졌는데, 그건 영상의 결말 때문이기도 했다.


‘이름에는 누군가의 소망이 담겨있다.’



네 이름으로 나를 불러줘


 이름이 가장 로맨틱하게 활용된 예는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아닐까. 제목부터 이름이 들어가는 영화다. 특히 주인공인 올리버와 엘리오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을 지나칠 수 없다. 올리버의 속삭임, ‘Call me by your name, and I'll call you by mine (네 이름으로 나를 불러줘, 난 내 이름으로 너를 부를게)'을 들을 때, 관객 또한 덩달아 숨죽이게 된다. 단순히 그가 소리 낮춰 말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달달하다 못해 녹는 고백에 엘리오가 어떻게 답할지 긴장되기 때문이다. 이 긴장은 바로 풀리는데, 왜냐면 엘리오가 바로 "엘리오." 하기 때문이다. e를 발음하는 엘리오의 입, '넌 나고, 난 너야.' 인정하는 그 입! 순간 나는 그만 소리를 꺅 지르고 말았다. 그동안은 서로 거리를 재고, 떠보기만 하던 개인 둘이 (실제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가장 꾸밈없는 상태로 만나, 너는 내가 되고 내가 네가 되는 일체의 상황을 맞이한 게 너무 달달해서.



영화처럼 로맨틱한 상황은 아니지만, 나도 일상에서 이름과 호명의 의미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 과거에 다닌 회사에서는 직장 선배가 후배의 이름을 "~야!" 하고 직접 부르는 방식으로 친근함을 표현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외주 업체 직원이나 프리랜서는 "~씨", 라고 부르는 걸로 거리를 뒀다. 나는 주로 ‘미지 씨’라 불렸다. 회사 내부 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당시 일도 거의 정규직처럼 하고 있던 참이어서 그게 참 서운했었다. 그런데 이런 말을 정규직인 직장 동료에게 했더니, 그는 의외의 말을 했다. 선배들이 ‘누구야’라고 자기 이름을 부르는게 적응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건 마치 후배를 동등한 동료로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결국 호명은 쌍방이 합의한 방식으로 이뤄질 때 가장 합리적인 것일까. 어떤 상황일 때 내가 '미지야' 불려도 기분나쁘지 않은 걸까,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존재에 관심을 갖는 사이라면...


 서로의 존재에 관심가지는 사이라면, 서로를 이름만으로 불러도 상관 없지 않을까. 그게 누구 씨든 누구야 든 상관 없이.


역시 서로를 이름만으로 부르는 어떤 이와의 대화에서, 나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중요한 건 이름을 부르느냐 아니냐니까. 예를 들어 '날 낳은 여성'의 개인적인 감정이나 역사를 들여다 볼 땐 그냥 “엄마” 보다 “누구 씨”라고 이름을 꼭꼭 불러주는 것. (이런 경우 누구야, 하면 이건 좀 결례니까.) 또 친한 친구를 다정하게 부를 땐 “야!” 보다 “누구 야!” 하고 불러주는 것. 그런 식의 호명을 통해 우린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러려면 상대와의 충분한 대화를 통해, 어떤 호칭이 맞는 관곈지 살펴야겠지만.


나의 존재에 진심으로 관심갖는 누군가라면 나는 기꺼이 허락해줄 수 있다. 불러줬으면 좋겠다고. 이름으로,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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