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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지의 세계 Jun 03. 2020

이렇게나 정직한 책상

하루 중 가장 오래 머무는, 책상에 대해

 아침마다 매번 같은 곳을 향해 간다. 목적지는 회사 책상 앞. 책상에 가방을 놓고, 노트북을 켜고, 커피를 타 와서는 의자에 앉으며 한숨을 후욱-쉰다. 출근 끝. 일련의 과정을 지겹다는 듯 묘사했지만 사실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이야기를 생각하면 감지덕지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식이면 책상 빼!” 이런 이야기. 게다가 요즘은 취업난이 극심하다. 어느 회사에든 내 책상이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그런 시기니까.


 회사 책상은 기성품이다. 물론 공장에서 만들었든, 제작이든 큰 상관은 없다. 하지만 하루 중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니 소소한 즐거움이나 위안을 줘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게 부여된 책상 구석구석을 나름대로 채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책상 주변을 둘러싼 파티션을 무언가로 열심히 채웠다는 의미다.



 먼저 왼편은 ‘친한 선배의 농담 세션(!)’.  당시 고민이 담긴 메모를 우연히 선배가 보고 반 농담 식으로 댓글을 달았는데, 그게 묘하게 위로가 돼 몇 년 동안 갈무리해 둔 곳이다. 그중 하나만 소개해보자면 이렇다. 취재 차 연극을 관람하면서 주인공 대사 “내 영혼은 이곳에 정을 붙일 수 없구나” 를 메모했다. 그런데 ‘정’의 ㅇ받침이 급하게 휘갈기느라 ㅁ처럼 적혔다. 그러자 이 메모를 본 선배는 ‘점, Drama’ 라고 쓰고, 눈 밑에 점이 있는 사람 얼굴을 그려뒀다. 아마도 점을 찍으면 다른 사람이 되는 어느 막장 드라마를 생각하신 것 같은데, 그걸 본 난 ‘왜 선배가 화가가 되지 못했는지 알겠네요.’ 하며 빈정대고, 선배는...


음. 농담은 설명할수록 재미없어진다, 는 사실이 새삼 생각났다. 그래서 다음.

선배의 농담 세션에 붙어있는 쪽지들...  그리고 시간이 좀 더 지나자 그 위에 '칼퇴 제일' 스티커가 붙었다. 선배의 농담으로도 치유가 되지 않는 연차가 된 탓일까...


 시선이 닿기 가장 편한 곳은 일명 ‘문화 세션’이다. 시각적으로 즐겁고 머리를 쉴 수 있도록 구성했는데, 아무래도 책상에 앉아 가장 많이 쳐다보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도사 전우치처럼 그림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언제든 가고 싶은 곳들의 엽서가 있고, 또 아트 자석들도 붙어있다. 물론 익숙해진 만큼이나 색이 바래서 점점 쳐다보는 횟수가 줄었지만, 그래도 눈이 피로할 때 종종 쳐다보며 위안을 얻는다.


  그 옆에 걸린 시와 문구는 할 말이 아주 많기도, 없기도 하다. 요약하면 사회인으로의 다짐, 생각과 맥이 닿는 글들인데... 자세히 풀어내자면 또 새로운 문서 파일을 열어 하루 종일 써도 부족하다. 업무 스트레스나 인생에 대한 회의감을 토로하자면 (다들 하는 착각처럼) 끝도 없이 할 수 있을 것만 같으니까. 그래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허연 작가의 ‘목요일’이란 시는 ‘그 꿈이 나한테 이럴 수가’로 끝다. 화자는 어떤 꿈을 품었는데, 그 꿈에 배신당한 것 같다. 나 역시 꿈꿨던 일을 꿈 같이 하고 있지만, 그 일을 하는 과정은 배신의 연속이다. 공정하게 진행될 줄 알았던 일이 그렇지 못하게 이어진다거나, 공익을 위한 일이 사실 수많은 개인의 사익으로 구성됐다거나.... 순수하고 사소한 신념이 종종 배신당하면서, 소위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회의감은 그 옆에 다른 시구를 붙여 다스리고 있는데, 이런 문장이다. ‘여태 껏의 생애를 단 한 줄의 글로 기록한다면 어떤 문장이 살아남아 나를 알리겠나’. 그러니 열심히 살자고. 비록 어떤 신념은 전복되고, 배신당하지만 그럼에도 스스로에게도 창피하지 않을 정도로 떳떳하게 살자고 다짐한다. 소한 배신은 나를 무너뜨릴 수 없다,고 거듭 확인하면서.



 오른편엔 책장이 있다. 일하며 받은 자료와 책들, 그리고 선물로 받은 이끼 화분이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버리지 못하는 자료들에는 제작자의 고민과, 노력이 함축되어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저 수많은 책들과 자료가 여러 ‘사람들’의 화신 같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문제는 일을 하면서 계속 새로운 책들과 자료를 받고 있다는 건데.... 일하며 만나는 수많은 주장들 만큼이나 어지럽다. 자료들이 너무 쌓여 내 '영역' 침범하지 않도록, 냉정히 판단하고 덜어야겠다 생각한다.



 사실을 하나 고백하자면, 책상 소개라고 해놓고 파티션 위주로 소개한 데는 책상이 정갈하지 못한 탓도 있다. 남들 보여주기 창피하다. 털털한 성격의 반증이다. 그러나 내 책상은 단순히 어지러운 책상에 그치는 게 아니라, 멀리서 봐도 티가 난다. 눈에 닿는 곳마다 내가 아는 이야기가 있어서다. 그러고 보면 기가 막힌다. 아니, 이렇게나 정직한 책상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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