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 1914 창의문화원구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8시 전후였다. 그 시간은 거의 모든 가게와 전시장이 문을 닫는 시간이었다. 좀 아쉬웠지만, 거기서 제일 유명한 것 같은 오르골 가게가 불을 밝히고 있어 그나마 위로가 됐다. 만약 그 가게의 존재를 알았다면, 나는 주변 오르골 덕후들에게 모두 전화를 돌려, 내가 기꺼이 원하는 선물을 사가겠노라고 공언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아름답고, 아기자기한 오르골들이 많았다.
화산 1914 창의문화원구는 과거 양조장이었던 공간을 문화 공간으로 재창조한 공간이다. 이제는 술통 대신, 아기자기한 수공예품 숍이 가득 들어서있다. 나무들과 건물들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어, 마치 숲 속 나라에 온 듯 한 착각이 들었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도시 재생의 교과서라고 느껴졌다면 지나친 말이었을까. 실제 젊은 감각의 문화공간으로 구성했기에 대만 젊은이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공간이라고 했다. 멋진 야경도 실컷 감상했지만, 밝은 데서 젊은 감성이 북적이는 느낌은 어떨지 너무나 궁금했다. 대만에는 이 외에도 담배 공장, 물류창고 등을 문화 예술 공간으로 만든 곳들이 많은 것 같았는데, 그런 공간만 골라 둘러봐도 재미있었을 것 같다.
그 다음으로 들른 용산사는 정 반대의 느낌이 들었는데, 아무래도 사찰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불교, 도교 등 온갖 종교가 혼합된 그 곳에는 정말 각종 신들이 각자 자리에서 신자들의 기도를 듣고 있었다. 소원 별로 관장하는 신이 다르다보니, 사람들은 제일 절실한 소원을 들어줄 신 앞에 먼저 발걸음했고, 그 다음 순서대로 모든 신 앞에 인사를 하고 있었다.
용산사에서는 두 개의 나무 조각으로 점을 볼 수 있었는데, 점을 어떻게 보는 줄 몰라서 다른 사람들의 모습만 구경했다. 오랜 시간 검색과, 눈치로 보건데 소원이 이뤄지려면 몇 차례 같은 모양의 나무 조각이 나와야 하는 것 같았다. 한참 나무 조각을 주워 던지는 이가 보였다.
그를 남몰래 관찰하며 괜히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무슨 소원이기에 저리도 열심히 비나. 무엇이 저 사람을 저렇게 절실히 만드나. 어딘가에 절실한 사람은 보는 이로 하여금 괜히 마음 아리게 하는 힘이 있다. 향 냄새가 가득한 그 분위기가, 사람을 더욱 감성적으로 만드는 것 같기도 했다. 누군지도, 어떤 소원을 관장하는지도 모를 신들에게 둘러쌓여, 어제 주운 돈 1완을 제단 위에 올려두었다. 그런 행위 만으로도 대만의 너그러운 신들은 멀리서 온 이방인을 위해 축복을 빌어줄 것만 같았다.
1/2 목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집 근처에서 간단히 샌드위치를 먹었다. 서툰 말로 주문을 하고 나니 호기심 많은 가게 주인이 말을 걸어왔다. 그는 적당한 한국말을 써서 우리 일행을 웃게 했는데 그 내용은, 이를테면 “한국인?”, “싸이 알아!” 이런 거였다. (정말... 싸이의 위대함은 해외가서 더욱 느끼는 것 같다.)
친절하고 유쾌한 아저씨가 계시던, 동네 아침 식당... 저 컵에 든 게 바로 커피다.
비가 걷힌 대만의 거리는 유독 색채가 뚜렷했다. 공항버스에 오르고, 대만의 시내를 지났다. 새해가 끝난 날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은 기분 탓인지 모두 차분해보였다. 여행내내 봤던 타이베이의 모습, 그러니까 들뜨고, 모두 좋은 말만 하는 새해 전날과 새해의 분위기와는 아주 대조적인 거였다.
새로운 시작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우울하다, 거나 처연하다, 는 감정이 왜 고개를 드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아마도 곧, 일상에서 삶의 숙제들을 하나씩 해나가야 함을 직감해서였을 것이다. 물론 더 단순한 감정일 수도 있었다. 휴가는 끝났고 바로 일상으로 복귀할 일만 남았다는 우울감. '나이 30을 기점으로 삶의 방향을 고민해보자'는 거창한 목표 아래 떠난 길이었다. 다시 집에 돌아가면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을지, 명확한 답 대신 모호한 희망만 급하게 기념품으로 챙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