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날, 대만에는 비가 왔다. 타이베이 101빌딩과 단수이를 둘러보는 날이었다. 대만 시내에서 단수이까지는 거리가 꽤 됐다. 가는 데만 지하철로 1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그래도 단수이는 빼놓을 수 없는 곳이었다. 아직까지 인생 영화로 꼽고 있는 ‘말할 수 없는 비밀’ 촬영지여서다. 기대되는 일정을 훑으며 숙소 근처 카페에 들렀다.
그다지 맛있지는 않은, 상상할 수 있는 맛의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데 동네 주민들도 한,두 명씩 들어와 브런치를 시켰다. 대체로 젊은 여성들이 많았다. 편한 복장으로 책 읽고 브런치 먹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 복장을 봤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여행객 느낌이 나는 옷이었다. 꾸민 듯 안 꾸민 듯, 신경 쓴 느낌의 옷. 그제야 조금, 그들과 나의 차이가 느껴졌다.
대만 일정 둘째 날 들렀던 숙소 근처 카페
역 근처로 가자 볼펜, 티슈 등을 나눠주며 선거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당시 대만은 총선을 앞둔 상태였다. 선거 물품에는 전부 QR코드가 붙어있었다. 우리나라만 해도 QR코드를 잘 활용하지 않는데 대만은 이런 방식이 활성화되어있는지 궁금했다.
여기서, ‘QR코드 활용’에 대한 내용이 ‘궁금했다’로 끝나는 이유는 경험상 거의 90% 정도 확실한 사실 같은데, 확실한 확인을 하지 못해서다. 여행지에서 궁금증이 생기면, 새삼 언어의 장벽을 크게 느끼게 된다. 직업병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궁금한 건 무조건 묻고, 새롭게 아는 즐거움이 큰 사람인데 그러지 못해 답답했다. 아쉬운대로 한글로 된 포털사이트에 이래저래 검색해봤지만 답을 얻지는 못했다. 중국어를 배워야 하나, 잠시 실없는 생각을 했다.
타이베이 101 빌딩에 가니 사방에서 관광객들이 모이고 있었다. 입구에는 어느 음식점이 오픈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는데, 대기 줄이 엄청 길게 쳐져있었다. ‘저 줄이 전부 다 차나?’ 싶을 정도로 대기 공간이 길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빌딩 위를 돌아보고 오니 그 줄이 모자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는 점이다.
알고 보니 그 식당은 TV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에도 나왔던 집이었다. 한국 방송에 등장하면서, 한국 등 아시아 팬들이 더 많이 늘었다는 거다. 그러나 이런 가게야말로 내가 가장 기피하는 곳. 이런 식으로 유명해진 집은 가격이 오르거나, 대기 시간이 지나치게 길어져, 돈과 시간을 겨우 모아온 뚜벅이 여행자에겐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 공간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는 평생, 101 빌딩 밑에 있는 저 맛집 샤오롱바오 맛은 모르고 살겠지. 그게 좀 서운하려나. 왁자지껄한 사람들을 얼른 지나쳐왔다.
타이베이 101 전망대에서의 감상은 크게 2가지 였다. 먼저, ‘이런 고층 빌딩이 안전하게 유지될 수 있는 비법도 관광 대상이 될 수 있구나’ 하는 것. 지금은 아니지만, 2010년까지 대만 101빌딩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다. 자연스럽게, 바람 등의 영향을 덜 받고,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안정성 확보가 무척 중요했다. 거대한 추가 아래 층에 매달려 건물과 함께 조금씩 흔들리며 중심을 잡고 있는데, 이런 내용들이 맨 윗 층, 전망대에 친절히 적혀있다.
1. 타이베이 101 전망대서 본 대만 시가지 2. 건물 중심을 잡고 있는 추 3. 타이베이 101 빌딩 마스코트와 함께
다른 하나는 ‘스카이워크 예시 사진으로 환하게 웃고있는 저 외국인은, 본인의 사진이 이렇게 걸려있다는 걸 알까’ 였다. 모델일거라는 생각도 들지만, 또 그렇다고 하기엔 인위적인 느낌은 없고... 정작 그는 개의치 않을 수도 있지만, 저작권에 민감한 콘텐츠 제작자(?)로서는 그 부분이 계속 신경쓰여 그 사진 앞에서 오랫동안 서 있었다... 큰 맥락상 중요하지 않더라도 한번 꽂히면 계속 생각을 거듭하는 못된 버릇이 다시 도진 순간이다. 일행의 재촉에 못 이겨 발걸음을 옮겼지만 사실은, 아직도 진실이 궁금하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은 아직도 인생 영화로 꼽고 있는 작품들 중 하나다. 아름다운 풍경, 음악, 그리고 결말까지 여운 투성이다. 한번 보면 열병을 앓을 수밖에 없다.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어린 마음에도 싱숭생숭했고, 또 그런 사랑을 꿈꿨었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난데없이 왔다가 사라지는 누군가와 사랑한다는 걸 감내할 순수함이 없다. (욕이나 안 하면 다행이지...) 음, 이런 식으로 기억이 흐릿한 옛 명작을 재평가해서 감상을 파괴하는 행동을 하는 게 맞는지 스스로도 마음에 안 든다. 영화를 다시 한 번 봐야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습기 가득한 지하철을 탔다.
타이베이 시내에서 단수이로 가는 길이라면, 책 등 읽을 거리를 넉넉히 가져가야 한다. 1시간 남짓 지하철로만 이동하는 거리여서다. 나는 e-북으로 천관율 ‘줌아웃’과 정혜선 ‘당신이 옳다’를 준비해갔었는데, 이 두 책을 번갈아가며 거의 다 읽을 때 즈음 단수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단수이역 근처 풍경. 여기서는 대만 사람들도 관광객처럼 거리에서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단수이는 원래 노을이 유명한 곳이지만, 어스름한 분위기 외에도 모든 게 사랑스러운 곳이었다. 모든 것, 이라고 한다면 사람들과 가로수, 길, 바람 등 정말 모든 것을 말한다. 현지인과 최대한 비슷하게, 가 여행의 모토라고 해도 온통 붉은 빛의 ‘홍마오청’에 서면 그런 결심이 일시에 해제된다. 그 정도로 아름답고, 요즘 말로 소위 ‘인스타 각’이다. 함께 여행하던 이가 질색팔색을 해서 얼른 대충 사진 몇 장 찍고 빠져나왔다. 그 대충 찍은 사진 몇 장도 아주 마음에 들어서 오랫동안 SNS 프로필 사진으로 해둘 정도였으니... 그 아름다운 배경은 더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다.
막 찍어도 엽서같은 홍마오청 전경
다시 한참 기다려 버스를 타고 어인부두까지 갔다가 천천히 걸어 구름들을 감상했다. 그리고 역 근처까지 가는 배에 올라 타 단수이의 아름다운 노을을 만났다. 남긴 글은 두 문장 뿐이지만, 사실 부두 위를 걸은 그 두 세시간은 타이베이 여행 중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 이런 저런 말을 붙이고 싶지 않을 만큼.
참, 배를 기다리며 운 좋은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거리의 음악가들을 만나 공짜 음악을 들었던 것. 다른 하나는 항구 안내소의 현지 직원이 안내판을 이해하지 못한 한국인 관광객들을 딱히 여겨, 친절히 안내해줬다는 것.
조용하고, 차분하고, 공기마저 부드러운 순간이 지나고 있었다.
1. 단수이 역으로 돌아가는 배 위에서 본 노을 2. 타이베이 관광 중 가장 빛난던 순간. 역 근처 광장에서.
감성도 어느정도 다 채우고, 체력은 거의 바닥난 시점이었지만 사실상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기에 몇 군데 더 들르기로 했다. 다음 목적지는 화산1914 창의문화원구와 용산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