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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 Jan 16. 2022

사랑한다고 말하기

유학생 일기 3

    어렸을 때, 아빠 힘내세요라는 노래를 좋아했다. 그 노래를 부르면 아빠가 정말로 힘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소리를 크게 내는 것이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인 줄만 알았던 어린 시절 언젠가 아빠를 졸졸 쫓아다니면서 목청껏 아빠 힘내세요 노래를 불렀던 것도 같은데 몇 살 때인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빠 얼굴을 보려면 한참 올려다보아야 했던 것을 보면 아마도 무척 어렸을 때인 것 같다. 그 시기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엄마, 아빠 사랑해요."라는 말도 곧잘 했던 것 같다. 어렸을 때에는 이처럼 부모님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게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는데 청소년기를 거치며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새 애정표현이 너무 부끄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자주 만나서 함께 공부를 같이 하는 같은 과 친구 A는 한국계 미국인이다. A는 살면서 추석이나 설날을 경험해 본 적이 없고 크리스마스가 1년 중 최대 행사인 미국인이다. 그녀는 나와는 영어로 대화를 하며, 부모님과는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서 사용한다. A는 나와 함께 공부하다가 종종 부모님과 통화를 하곤 하는데 꼭 마지막에 "I love you 엄마" 등의 애정표현으로 전화를 마무리한다. 처음 봤을 땐, 정말 미드나 영화에서 주인공이 가족들과 통화할 때 보던 방식으로 전화를 끊는 걸 보는 것 같아서 그저 신기했다. 하지만, 해당 장면을 몇 번 보고 난 후 나는 언제 마지막으로 부모님께 사랑한다고 말했지? 하고 의문이 들었다. 내 기억으로는 미국에 오기 전 카톡으로 사랑한다고 전한 게 가장 최근에 했던 사랑 표현이다. 그렇다면 직접 육성으로 사랑한다고 말한 건 언제일까 하고 떠올려보니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나는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부모님께 하는 애정표현에 인색한 사람이 되었던 걸까.


    중학교 1학년,  나는 정말 우연한 계기로 5인조 남자 아이돌 그룹에 빠지게 되었다. 당시 각종 플래시 게임을 하느라 자주 접속하던 쥬니어 네이버에 그들의 뮤직 비디오가 올라왔기 때문인데, 평소 눌러보지도 않던 뮤직비디오를 그날따라 왜 눌러보았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홀린 듯이 뮤직 비디오를 연속으로 세 번 재생한 후 어린 마음에 남자 아이돌 그룹에게 빠졌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해서 일부러 그들의 경쟁곡에 인기투표를 했다. 일종의 입덕 부정기였던 셈이다. 얼마 후 나는 그들의 노래를 다운로드하여 MP3에 넣고 밤낮없이 듣는 지경에 이른다. 그뿐이랴, 그들이 출연한 모든 방송을 챙겨보고, 각종 펜페이지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사진을 저장하고 노래가 나오면 학교에 다녀오는 동안 공기계까지 켜놓으며 각종 음원사이트 스트리밍을 돌려놓는 등등.. 하나하나 설명하자면 아이돌 팬이 아닌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정말 최선을 다했다. 내가 유학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전까지 10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5인조 아이돌 그룹에서 현재는 듀오 그룹이 된 그 그룹을 정말 온 마음을 다해서 좋아하고 응원했다. (10여 년이 넘은 덕질을 예전과 같은 마음으로 병행하기에는 내 인생이 많이 벅찼다.) 그들을 좋아하는 동안 나는 그들에게 애정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닿지 않는 대상에게 하는 말이라 부끄러움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오빠들이 미치게 좋아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 그룹의 모든 것을 사랑했던 것 같다. 이걸 쓰면서도 어떻게 그렇게까지 정신머리 빠지게 좋아했는지 나 자신이 신기해서 웃음이 나온다. 멀리서 빛나는 별 같은 존재인 그들에게 아낌없이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너무나도 쉬웠다.


    나에게는 뭣도 모르는 대학교 1학년  만나 현재까지 교제해온 남자 친구 K 있다. 물론 중간  달은 서로 떨어져 있기도 하며 삽질한 기간도 포함이다.  친구는 아마 내가 최근    사랑한다는 말을 가장 많이 전한 대상일 것이다. 처음 만났을  우리   대학교 1학년이었는데, K 수많은 20 초반의 남자애들이 그렇듯 자기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친구였다. 나는 K로부터 애정표현 폭탄을 맞으며 처음 1년은 부담스러움에 어쩔  몰라하는 시간을 보냈다. 나도  친구가 좋았지만 많이 혼란스러웠다. 처음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내가 아이돌 그룹 좋아하듯 누군가를 그렇게 좋아해  적도 없는 애가 사랑에 대해  안다는 거지?' 하는 의문만 들었던  같다. 이제야 인정하는 거지만 그때는 나도 정말 많이 어렸다. 한편으로는  눈을 직접 마주하고 이야기를 주고받을  있는 대상에게 직접 마음을 표현한다는 점이 많이 부끄러웠던  같다. K 본인이 애정이 있다면  빠진 독에 물을  번이고 부을 의지가 있는 친구다. 오랜 시간에 걸친 그의 꾸준한 애정은 나에게도 표현할 용기를 심어 주었고 어느샌가부터 나도 자연스럽게  마음을 직접 전할  있게 되었다. 물론, 직접 말로 사랑을 표현하는  K 비하면 아직  길이 멀다.


    살다 보면 굳이 말로 전하지 않아도 사랑이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그리고 삶의 어느 순간에는 그 사랑이 너무나도 당연해 잘 느끼지 못할 때도 많다. 나에게는 가족의 사랑, 특히 부모님의 사랑이 그렇다. 몇 달 만에 돌아온 집은 먹을 게 쌓여있었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이것저것 다 빠지지 않고 있었다. 떡볶이 만들기 키트도 있고 (애석하게도 한국에 있는 동안 굴을 잘못 먹고 노로바이러스에 걸려서 혹시 매운 걸 먹고 배탈 날까 봐 떡볶이는 먹지 못했다. 정말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감자 과자 같은 군것질 거리부터 소고기, 돼지고기 등등 부모님께서 나를 먹이시려고 준비하신 것들로 가득했다. 엄마도 아빠도 내 마음을 어찌 아셨는지 내가 먹고 싶었던 것들을 매일매일 준비해주셨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당연하게도 자가격리 기간을 포함해 나는 매일매일 포식했다. 행복에 겨운 나날들이었다. 엄마는 처음에 미국에서 막 돌아온 내 얼굴을 보시고 얼굴이 안 돼졌다고 하시고 아빠는 우리 딸이 미국 가서는 말라져서 왔다고 하셨지만 너무 잘 먹은 탓에 모든 것은 금방 돌아왔다. 다시금 동그래진 거울 속 내 얼굴을 보고 학기 중에 버겁게 스스로를 챙기며 잊고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내가 원래 이렇게 사랑받고 소중한 존재였다는 것과 한편으론 이게 사랑이구나하고.


    미국에 오기  가방을 싸면서 엄마는 집에 있는 천으로 캐리어 손잡이에 감아둘 손수건을 만들어주셨다. 빨간 바탕에 해바라기가 프린팅  예쁜 천으로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알아볼  있다. (내가 가진 옷의 7할은 엄마가 만들어주신 옷일 정도로 우리 엄마는 바느질의 귀재이신데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이와 관련해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이번에 미국으로 들어오며 미국 내에서 중간에 환승을 해야 했는데 이는 환승 공항에서 1) 입국 심사를 마치고 2) 세관신고를   3) 짐을 찾아 다시 부치고 4) 보안 검색대를 통과해 비행기를 갈아타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세관신고를 직접  만큼 큰돈을 사용할 일은 없기 때문에 세관신고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이번에는 환승시간이 2시간으로 무척 촉박해 최대한 빨리 모든 절차를 밟아야만 했다.  시간이 조금 넘는 대기 후에 입국 심사를 겨우 마치고 뛰어가니 빨간 해바라기 손수건을 보고 바로  짐가방을 찾을  있었다. 모든 절차 이후,  비행을 마치고 무사히 집에 도착해서 가방을 열었을  예상하지 못한 작은 친구들이 가방 안에 우수수 떨어져있었다. 바로 포스트잇이다. 아빠는 문구용품 모으는  좋아하셔서 아빠가 넣으신 건가 하고 추측해보았는데  추측은 맞아떨어졌다. 도착한 다음날 아침을 먹으며 부모님과 영상통화를 했는데, 아빠의 깜짝 선물이라고 하셨다. 공부할  요긴하게 쓰라고 넣어두셨다고 한다. 너무 새삼스럽고 당연한 소리일  있지만  스스로를 포함해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 부모님의 사랑이 함께하고 있었다.

     

엄마가 만들어주신 손수건과 아빠의 깜짝 선물 포스트잇


    이번에는 공항에서 부모님과 작별인사를 하기 전에 나는  부모님께 사랑한다고 직접 말씀드리고 싶었다. 편지나 카톡이 아니라 직접 말로 하려니 괜히 겸연쩍고  한동안 가족들과 헤어지려니 눈물이 나서 결국 제대로 말씀드리지는 못했다. 무슨 말만 하려 하면  눈물이   같은지 모르겠다. 그저 엄마를 안아드리며 제가 엄마 아빠를 엄청 사랑하는  아시죠? 하고 겨우 말씀드렸을 뿐이다. 엄마는 안아주시면서 당연히 알고 있지 하고 말씀하셨다. 가족과 소중한 사람들을 뒤로하고 해외든 국내꿋꿋하고 씩씩하게  지내시는 분들이 많을 텐데 나는 아직도  길이   같다.   


    너무나도 즐거워서 꿈과 같던 나날을 뒤로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아침밥으로 식사를 준비하던 나는 만두를 태웠다. 아주 새까맣게 태웠다. 이내 집안은 탄내와 연기로 가득 찼고, 그래도 속은 익었겠지 하고 다 탄 만두피를 걷어낸 만두는 속이 차갑고 단단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만두 속을 수저로 잘게 부숴서 전자레인지에 돌려버렸다. 새삼스럽게도 서투른 조리 솜씨로 다 타버린 만두 덕분에 나 스스로 나를 챙겨야 하는 곳에 와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다 부서진 만두를 적당히 지은 밥에 비벼서 먹어보았더니 너무 맛있다. 역시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만든 가공식품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오랫동안 글을 올리지 않았다. 기말고사 준비로 많이 바빴기도 했고,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방학을 맞이하여 한국을 다녀왔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머무는 기간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사랑이 듬뿍 느껴지는 환경에서 있다 보니 매분 매초  순간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이 커서   생각이 들지 않았던  같다. 자가격리를 포함해 한국에서 지낸 지난 18일간 내가 얼마나 행복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자고 일어나면 얼굴이 점점  동그래져서 매일매일 확인해본 체중계의 숫자가  대답을 대신할 것이다. 자가격리가 끝나니 시간이 너무 촉박하여 친구들은 거의 만나지 못해 아쉬웠지만 소중한 사람들과 보낸 시간들은 지극한 행복으로 가득했다. 모두가   먹이는 데에 혈안이 되어있는 사람들 같았다. 재미있는 기억  하나는 남자 친구와  터지게 먹고 부른 배를 두드리며 집에 돌아오자, 아빠가 족발을 꺼내시고 오징어를 구워주셨던 것이다. 내가 너무 배부르고 이러다가 살이 엄청   같아서 먹지 못하겠다고 하자, 어차피 미국 가면 빠질  많이 먹으라고 하시며 오징어를 구워오셨다. 배불러서  먹을  알았는데 맛있어서 오징어랑 족발을  먹었다.  이후로  먹성의 고삐가 풀렸다.

 

   알랭 드 보통의 책 영혼의 미술관에는 "예쁜 미술 작품의 쾌감은 현실에 대한 불만족에서 기인한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완전히 같은 맥락에서 나온 내용은 아니지만 부끄럽게도 나의 수필적 글쓰기가 내 스스로에게 주는 위로와 만족감은 대부분의 경우 어느 정도 불만족스러운 상황을 동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질은 일맥상통하고 있지 않나 싶다.

 

    만두를 태워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찬 집안을 환기시키느라 창문을 열어둔 현재 나는 손이 꽁꽁 언 채로 타자를 치고 있다. 나는 앞으로 만두도 더 많이 태우고 내가 만든 이상하게 맛없는 반찬도 많이 먹을 것이다. 전자레인지에 말도 안 되는 음식을 익혀서 음식을 터뜨리기도 하고, 그걸 치우느라 구시렁대기도 할 것이다. 물론 운이 좋은 날은 내가 했지만 제법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도 있겠지. 또 조만간 새 학기가 시작되면 쉽지 않은 공부와 학교생활에 가끔은 뿌듯하고 가끔은 울적해하며 끝없이 작아지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사랑으로 가득 찬 소중한 존재라는 점은 나를 다시 한번 일으켜 세워주고 내가 걸어가고자 하는 길을 한 발자국씩 걸어 나갈 수 있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언젠가 스스로 일어나는 것이 힘에 부칠 때면 이 글에 기대어 다시금 힘을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감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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