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쯤이면 떠나야 할 때
2023년 12월 말, 대한민국 서울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병이 있다. 때가 되면 여행을 가야 한다는 '여행 병'이다. 중독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이유는 정확히 모른다. 잘 살아가다 보면, 일상에 집중하다가 '이때쯤이면'씨가 찾아온다. 이때쯤이면 이제 비행기를 타야 한다. 이때쯤이면 짐을 싸야 한다. 이때쯤이면 낯선 언어와 환경, 문화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그런 병이고 중독이다. 고약하기도 매우 고약하다. 시간과 비용이 필수로 수반된다.
나의 여행 병이 슬슬 고개를 들 때쯤, 우리 여행 메이트도 연초 다녀온 여행을 통해 후유증이 생겼나 보다. 아마도 전염이 됐나 보다. 슬슬 지인들을 통해 들었던 여행 정보를 쏟아낸다. 처음에는 지난 여행의 기억이 그녀의 삶에 의지를 불어넣은 것 같아 내심 뿌듯함이 생겼다. 그러다 두 번, 세 번씩 이어지는 흐름이 심상치 않다. 한 번은 듣다가 툭 내뱉었다.
'나 이번에 곧 여행 갈 건데, 같이 갈래?'
무심코 던진 그 말에 여행 메이트의 표정이 달라진다. 아마도, 짐이 될까 내심 걱정하는 마음도 있겠지만, 함께 가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던 게 아닐까. 그녀는 항상 나에게 말할 때, 무슨 말을 할 때면 습관처럼 이 말로 대답을 시작한다.
'네가 괜찮다면'
'진짜 같이 가도 돼?'
'응, 그럼'
그렇게 우리는 처음으로 단둘이 함께 비행기를 타고, 동남아시아 베트남으로 향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나와 우리가 되어 2번째 여행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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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혼자 여행을 하는 이유를 생각했을 때, 가장 큰 이유는 모든 결정의 주체는 '나'기 때문이다. 선택에 대한 책임도, 감정에 대한 주체도 모두 나이기 때문에 체념과 수긍이 당연한 과정이다.
여행을 함께 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서로의 취향에 따라 합을 맞추고 결정을 하고, 또 토론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은 쉼을 위해 여행을 선택하는 나에게는 지치는 일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혼자서 여행하는 것을 선호하기도 한다. 감정을 뱉어내는 순간이기도 하고, 평상시 생각하지 못했던 스스로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기도 한다.
2019년, 10월 인도네시아 발리로 혼자 떠났던 봉사여행. 코로나19 시작 직전 다녀온 나의 솔로 여행 목적지. 그때가 아니었다면, 내가 팬데믹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싶다. 그만큼 여행을 가는 이유는 어쩌면, 그때 내가 느끼던 감정들로 지금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지 않을까 싶다. 그곳의 일렁거리는 노을은 나를 긴 시간을 버티게 해 준 꿈이었다. 그런 나에게, 이번 여행은 결정 뒤에 약간의 걱정과 무게가 있는 여정이다. 워낙 여행 일정을 타이트하게 세우지 않는 나름 MBTI의 P에 가까운 유형이라, 시간이 다가오면 그때 계획을 세우는 편이었던 나인데, 함께하는 여행 메이트 앞에선 책임감이 생겨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