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나무를 심는 남자 2/3

나무와 빛과 소음

by 소피

# 나무와 빛과 소음


나무를 심던 남자는 잠시 집으로 들어가 돗자리와 물병 하나를 들고 마당으로 나왔다. 돗자리를 펼치고 엉덩이만 살짝 걸치도록 앉았는데 겉으로 보이는 나이대의 남자들에 비해 튼튼한 엉덩이 윤곽이 돋보이고 있었다. 남자는 물을 마시다 멈추고 아까부터 계속 느껴지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은근히 느껴지는 시선의 출발점은 바로 건너편 건물 2층 창문이었는데, 살짝 열린 커튼 틈으로 한 소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남자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털어내며 일어났다. 짧은 휴식을 끝내고 돗자리를 접어 챙기던 남자는 다시 한번 길 건너 2층을 바라보았다. 불은 꺼져있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분명히 서로를 인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음산동의 밤을 서울에서 가장 어두울 것 같다고 말한다. 그중에서도 조금 더 특별한, 낮에 볕이 들어도 그늘진 기운이 느껴지던 곳. 사람은 떠나고 빛은 사라져 마치 4B연필로 끝없이 덧칠하는 듯 소문에 소문만 무성해 아무도 찾지 않던 음산동 중심의 그 집.


음산동 69번지.

도로명주소 음산로18길 29.


대문 앞에는 누군가 와서 읽어주길 바라는 온갖 전단이 벽과 바닥을 채우고 있었다. 우체통에는 그 집에 마지막으로 살았던 가족의 이름이 적힌 적십자 지로용지가 우체통 입구가 터질 듯 가득 꽂혀 마른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누구나 쉽게 혹은 살짝 뒤꿈치만 들어 올리면 마당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은, 그리 높지 않은 담벼락은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여기저기 금이 가고 깊게 갈라진 곳에는 이름 모를 잡초들이 자라고 있었다. 오랜 세월 빈집으로 방치되어 있던 폐허 같은 그곳에 드디어 사람의 발길이 닿았다. 나무를 심은 남자는 집을 떠나지 않았다.


음산동의 해가 지고 남자와 공간의 첫날밤이 시작되었다. 둘의 궁합이 잘 맞았는지 거실의 형광등은 껌뻑껌뻑 정신없이 요동치고 청소기 플러그를 박아 넣은 콘센트에는 불꽃이 튀었다. 예상치 못했던 자극에 대문, 담벼락, 마당, 현관과 거실 등 이 공간의 모든 것이 서서히 흥분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엄청난 기운의 빛과 소음이 음산동 중심에서 퍼져 나왔다. 그동안 쌓여 있던 공기와 먼지는 물론이고 한이 맺힌 이 공간의 하소연까지 모조리 불태우고 빨아들일 것 같았다.


남자와 공간, 그리고 빛과 소음.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온몸으로 친해지고 있던 그 시간. 담 너머에 사는 주민들도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신기한 광경에 집에서 나와 다가온 사람도 있었지만, 원하지 않았던 변화에 거북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그 집은, 그 공간은 어떤 존재였고, 지금 이 변화는 앞으로 어떤 의미가 될 것인가?


변화가 시작된 음산로18길은 지금 서로 다른 생각에 잠겼다.



001 나무를 심는 남자 3/3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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