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던 사람
# 기다리던 사람
음산부동산 사무실. 표 사장과 고 여사가 마주 앉았다. 흑구렁이 표 사장은 맥심모카골드를 꺼냈다가 다시 상자에 밀어 넣더니 유리병에 담긴 대추차 뚜껑을 열었다. 낡은 커피포트에서 물이 끓기 시작하더니 센서가 작동해 탁 소리와 함께 전원이 꺼졌다. 표 사장의 움직임은 뭔가 잘못을 저질렀거나 실수를 해서 고 여사의 눈치를 보는 상황은 아니고 무언가 엄청난 비밀을 말하기 전에 흥분되는 감정을 추스르는 모습으로 보였다. 표 사장을 노려보던 고 여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장님. 이러시기에요?”
“…”
표 사장은 대추차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아니, 사장님. 언질도 없이 이렇게 막 진행하시면 안 되시잖아요.”
“…”
“음산동. 우리 계속 기다렸잖아요. 혼자 결정하실 문제 아니잖아요.”
표 사장은 고 여사의 말을 듣고 코를 만지작거리며 창밖을 한참 바라보다가 일어섰다. 본인의 잔에는 대추차 한 스푼, 고 여사의 잔에는 세 스푼을 넣었다.
“고 여사는 찐하게. 나는 연하게.”
“농담할 기분 아니에요.”
“오늘은 고 여사는 한 스푼 더 찐하게. 나는 평소처럼.”
“찐하든 연하든. 상황 좀 정리해주셔야죠.”
“그래. 상황 정리해야지. 고 여사도 방금 보고 왔으니 할 말이 더 있겠고… 그렇지 않아?”
표 사장은 고 여사의 표정이나 말투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장난스럽게 대응하더니 오히려 상황 설명이 더 필요하냐고 묻는 듯한 표정으로 고 여사의 눈을 바라보았다.
“네, 맞아요. 저도 오늘 본 것이 있느니, 더 화가 나는 거예요.”
“오케이. 고 여사는 이미 평가를 마쳤겠지. 고 여사한테는 다 보이잖아.“
“…”
“… 고 여사님. 말씀해보세요.”
“흠…”
“고 여사님. 어떠셨는지요?”
고 여사는 바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표 사장에게 따지고 싶은 것이 있지만, 표 사장의 질문에 오늘 본 것이 어땠느냐는 생각에 집중하고 있었다. 고 여사는 그래도 따질 것은 따지고 싶었다. 대추차를 두어 모금 마시고 다시 표 사장에게 소리쳤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죠. 왜! 말도 없이, 진행해버리시냐고요.”
“고 여사. 목소리 좀 낮춥시다.”
표 사장이 다시 일어서서 창문에 블라인드를 바닥까지 닿도록 내리고, 입구로 가서는 잘 닫혀 있던 문을 괜히 다시 한번 열었다가 닫고 들어와서 앉았다. 두 사람의 비밀 이야기는 다시 시작되었다.
“고 여사. 그 부분은 내가 추가로 설명을 좀 해야겠지만. 내가 상황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상황 아시면서 이런 식이에요?
“일단 고 여사한테는 확실히 사과는 해야 대화가 되겠네.”
“사과 필요 없어요.”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고 여사. 허허허”
“웃지 마세요.”
“고 여사, 그런데 그럴 상황이 있었어.”
“저도 오늘 본 것도 있고. 두 사람 이야기하는 내용에서도 대략 예상되는 부분은 있어요. 그래서요? 계속 말씀해보세요.”
표 사장은 미안하다고 말하지만, 전혀 미안한 표정은 아니었다. 자세히 보면 고 여사도 자꾸 설명하라고 말하면서도 현재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고 여사. 나 표 사장이야. 블랙맘바 표.상.수.”
“블랙맘바는 무슨. 허리띠나 제대로 다시 채워요.”
표 사장의 불룩한 배 위에 검은 뱀 가죽 허리띠가 풀어졌는지 느슨하게 쳐져 있었다. 표 사장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허리띠를 다시 단단하게 채우며 말을 이어갔다.
“이렇게 일찍 올 줄 몰랐어.”
“계약은 언제 했는데요?”
“일단 내 이야기 좀 들어봐.”
“…”
“고 여사도, 우리 음영회 대표님들도 당연히 미리 알았어야 할 일이었지.”
“적어도. 저한테는 미리 말씀해주시고 같이 봤어야 했어요. 아시겠어요?”
“알지. 다 알지. 나도 그러고 싶었지. 그런데 이놈이 사무실에 처음 딱 들어왔을 때. 바로 느낌이 온 거야. 정말 이런 기운 풍기는 놈이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니까!”
“네. 그럴 것 같았어요.”
“그런데 그놈 잡으려면 바로 계약해야 했어. 고 여사한테 보여줄 틈이 없었어.”
“왜요?”
“이놈은 음산동에 안 와도 될 놈이었어. 그동안 69번지 보러 온 사람들하고 급이 다르단 말이야. 어떻게 보면 내가 떠날 수도 있는 놈을! 꼭 와야 할 놈을 내가 꽉 잡아놓은 거라고!”
“흠…”
“고 여사도 아까 봤잖아. 내 말이 맞지?”
“…”
고 여사는 오전에 있었던 새 이웃과 짧은 만남을 다시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여러 의미에서 매우 흡족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왜 웃어. 웃지 말고 말해봐. 고 여사.”
“그래요. 우선 기본 조건은 채운 것 같아요.”
“기본? 기본 정도가 아니었을 텐데.”
“네, 다시 말할게요. 확실해요. 기준 이상이에요.”
“그래. 나도 느꼈어. 고 여사가 확인을 다시 해봐야겠지만.”
“직접 만나봐야죠.”
“그래, 그래. 고 여사가 직접 물건 만나봐야지.”
“제가 볼게요. 그냥 물건만 가진 놈인지, 앞으로 아낌없이 할 수 있는 놈인지.”
“확실해. 확실해.”
표 사장은 들뜬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서성이며 계속 확실하다는 말을 혼잣말로 중얼거렸고 고 여사도 잠시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갑자기 또 짜증이 났던지 버럭거리며 표 사장을 쏘아붙였다.
“표 사장님. 저한테 지금까지 말씀 안 하신 거 있죠?”
“허허허허허.”
“제가 아직 보지 않았는데, 벌써 이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역시, 고 여사야. 대단해. 내가 확신하는 이유가 있지. 따로 있지.”
“빨리 말해요. 현기증 나려고 하니까.”
“궁금해?”
“뭐에요?”
“일월 님이 왔다 가셨어.”
일월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고 여사의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팔과 다리, 등에 누워있던 솜털까지. 온몸에 있는 털이라는 털은 모두 칫솔모처럼 벌떡벌떡 솟아올랐다.
“언제요?”
“지금도 와 계셔. 그놈 집에. 중요한 것은…”
“…”
“그놈 오기 전에 이미 알고 계셨어. 미리 왔다가 가셨어.”
“정말?!…”
표 사장은 태양열로 끝없이 머리를 움직이는 고양이 얼굴 자동차 방향제처럼 눈을 초롱초롱하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래. 정말이지. 확실해.”
“일월이 먼저 연락했다면…”
“이건 일단 나랑 고 여사 둘만 알고 있자고. 조만간 모일 때까지는 조심스러워.”
“잘 잡아봐야겠네요. 그런데 일월이 벌써 그 집에 오면, 올 놈도 떠나는 거 아니에요?”
“나도 그게 좀 신경 쓰이는데, 일월 님 말씀은 그렇게 해야 붙잡을 수 있다는 거야.”
“흠…”
“일월 님을 믿어야지.”
“일월 님을 의심하지는 않아요.”
“일월 님이 말한 대로 딱딱 진행되니까, 나도 지금 놀랐어.”
“고 여사. 이놈은 어디든 갈 수 있는 놈이었어. 당장 어디든 원하는 조건 맞으면 가격도 상관없이 어디든 계약해도 되는 놈이었어. 그래서 내가 붙잡느라 얼마나 고생했다고. 이제 우리가 할 일을 진행하자고. 고 여사가 어서 직접 확인할 수 있게 해보자고.”
“알겠어요. 공식 입주가 언제죠?”
“내가 최대한 늦춰 볼게. 걱정하지 마.”
“늦추다가 놓치지 말고, 어느 정도 준비되면 다시 이야기해요.”
“그래. 고 여사. 이번에는 진짜야.”
“명심하세요. 직접 보기 전까지는 몰라요.”
“그러자고.”
음산동이 기다리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음산동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003 전입 신고식 3/3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