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천사
버스정류장 분위기 역시 많이 변했다.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흥미로운 구경거리로 여기고 수군거리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녀가 멀리서 보이기만 해도 한발 물러서거나 미리 멀찍이 떨어져 서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변화의 시간이 지나고 그녀의 달리기를 변함없이 지켜봐 주는 사람은 나 혼자 남은 기분이었다. 그런 소문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어제도 오늘도 열심히 그 길을 달렸다.
봄과 여름의 경계는 없었다. 다행히 살인이나 칼부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살다 보니 계절은 여름이 되어 있었다. 나름 평화로워 보이는 여름 아침이 반복되고 있었다. 지구는 작년보다 조금 더 뜨거웠지만, 이상기후에 의한 때 이른 폭염 속에도 그녀는 매일 아침 달렸다. 물론 맑은 날에만.
폭염 속에서도 달리는 그녀는
정말 미친년 같았으며
망부석처럼 가만히 서서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한 남자는
그녀가 저러다가 쓰러져 죽기 전에
꼭 고백하리라 다짐했다.
아직 아침인데도 버스 안은 찜통 같았다. 에어컨을 세게 틀어도 등에 땀이 차는 폭염이 계속되고 있었다. 라디오의 일기예보에서는 조금만 더 버티시라고 하더라. 당분간 이런 날씨가 이어지겠지만 곧 장마가 시작되니 반갑게 맞이하자는 말이었다.
장마 예고 뉴스를 듣다가 당분간이라는 것은 얼마의 기간을 말하는 것일까? 장마는 얼마나 길어야 장마라 부를까? 이런 의미 없는 고민을 잠시 하다가… 장마… 장마… 장마가 시작되는 그녀를 당분간… 당분간… 장마가 끝날 때까지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달리기 시작했고, 모두가 미친년이라 불러도 나는 좋았고, 다행히 맑은 날이 훨씬 많아 그녀를 자주 볼 수 있어서 행복했었는데… 봄에서 여름으로 계절이 바뀌고 처음 맞이할 장마 예보에 그녀가 쉴 수 있을 것 같아서 다행이면서도 장마가 끝날 때까지 그녀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싱숭생숭 뒤죽박죽 복잡해졌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싱숭생숭과 뒤죽박죽은 짧게 끝나고 오히려 위축되고 소심 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자책의 시간이 찾아왔다.
야, 벌써 사랑이 식었어?
그런 건 아니야.
쪽 팔려서 고백하기 두려워? 자신 없어?
잘 모르겠어.
장마 시작하기 전에 말이라도 걸어봐. 바보야.
... 자신이 없어.
어휴, 바보, 병신. 이제는 너한테도 그냥 미친년으로 보이지?
아니야, 아니야. 절대로 아니야.
그럼 뭐야?
...
다음 주 월요일부터 장마가 시작된다고 했다. 정확히는 서울/경기는 오후 늦게 비가 내리기 시작할 거라고 했다. 우주에서 찍은 사진으로 장마전선의 예상 이동 경로까지 보고 있으니 정말 장마가 온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금요일이다. 금요일 저녁이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어떻게든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 그렇다면 기회는 딱 한 번, 월요일 아침에 용기를 내야 한다. 주말 중에 모든 두려움을 떨치고 월요일 아침을 준비해야 한다. 떨리고 뒤숭숭한 기분에 일찍 퇴근하고 싶었지만, 회사 선배들과 강제 회식이 잡혔다. 나는 여기서 막내다. 가자면 가고 가라면 가야 한다.
회식 자리에 동네 미친년을 좋아하는 내 마음을 알아주거나 고백하는 법을 조언해 줄 감성적인 선배는 없었다. 그들은 법인카드와 불금이라는 환상 조합에 정말 화끈하고 아낌없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 속에서 불금을 그저 불안한 금요일로 받아들이며 구석에서 혼자 소주를 마셨다. 그 누구도 나를 챙겨주는 사람은 없었고 홀짝홀짝 아무리 마셔도 달지도 쓰지도 취하지도 않아서 3차로 이동하는 길에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마침 집으로 가는 마지막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를 타면서 올려다본 밤하늘이 심상치 않더니 갑자기 미친 듯이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엄청난 빗줄기가 버스 창문을 깨부술 기세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때리고 있었다. 길가에 사람들이 비를 피하려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녔다.
우산이 없다.
우리 집은 버스정류장에서 15분은 걸어 올라가야 한다.
우산도 없고 집도 멀지만
우산을 사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잠시 후, 버스는 집 앞 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는데 몸이 휘청거리더니 물웅덩이에 제대로 빠지고 말았다. 빗줄기는 더 굵고 빠르게 쏟아지고 우산도 없이 걷는 내 운동화에서는 발을 디딜 때마다 거품 섞인 빗물이 뿜어져 나왔다. 이로써 우산을 살 마음이 완전히 사라졌고, 내가 지금 많이 취했음을 깨달았다. 살면서 이렇게 악재가 겹친 적은 없었는데, 영업을 마친 안경점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이 워낙 거지 같아서, 이대로 소주 한 잔만 딱 더하면 기분 좋게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짧은 거리였지만 엄청난 폭우와 비바람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히 젖어, 농산물 시장 바닥에 젖은 시래기처럼 축 늘어져 편의점에 도착했다. 소주 한 병에 미니 약과를 하나 사서 편의점 앞 파라솔에 앉았다. 플라스틱 의자 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어서 물이 잘 빠져서 좋았다. 여기서 음주는 불법이라는 말을 들었던 것 같아서 잠시 망설였는데 나 말고도 파라솔 아래에서 비를 피하며 술 마시는 사람이 많아서 안심했다.
몇 개 들어있지 않았던 미니 약과는 순식간에 사라졌고 옆 테이블 커플의 안주가 맛있어 보여서 골뱅이 한 캔을 추가로 사 왔다. 곧 소주병이 비었고 골뱅이는 남아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소주 한 병을 추가로 따게 되었다. 그렇게 취하고 더 취해가는 나를 누군가 안쓰럽게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시선을 확인하려 했지만, 몸을 가누기도 힘들고 눈은 침침해져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시선은.
멀리에 있다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나에게 뭐라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지갑이요.”
“...”
“지갑이요.”
“...”
“이거 그쪽 지갑 아니에요?”
“웨에? 므라그여어?”
몸과 혀가 동시에 꼬여서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 사람은 무언가 계속 설명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 순간. 갑자기 아까 꾸역꾸역 밀어 넣은 미니 약과의 쫀득하고 달콤한 향기가 식도를 타고 스멀스멀 넘어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을 했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역겹고 세상은 괘종시계 추처럼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지갑 떨어뜨리신 것 같아요.”
“… 으으. 눼으으웨.”
“괜찮으세요? 지갑 챙기셔야 해요.”
“… 눼으으아. 고맙수업니다.”
“아이, 이 사람 어떡해. 완전 취했네.”
“저 괜찮으시음니다. 으으으웨. 눼눼 눼눼.”
“일단 가방에 넣어놓을게요.”
“…. 으으으으으”
“저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보세요. 지금 지갑 가방에 넣어요!”
“… 우우우우우우.”
“가방 안쪽에 넣었어요. 저기요. 저기요. 잠깐만요. 여기서 이러시면…”
“웩 우웨에엑. 우왁 우왁 우웨에에엑.”
나의 모든 것이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마치 접사로 당겨 찍은 사진처럼 명확하게 보이는 환상적인 경험이 시작되었다. 액체 기체 고체 상관없이 나오는 순서대로 나에게 반갑게 인사했지만 나는 그것들을 무시하고 내 지갑을 주워준 천사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상황을 인지하면서도 부끄러움은 느껴지지 않았고 어서 빨리 모든 것을 세상 밖으로 보내고 제정신으로 제대로 된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 짧은 순간에 나는 또 잠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나는 좌절금지의 자세로 엎드려 있었고 고마운 천사가 내 등을 두드려 주고 있었다. 그런데 천사의 손길이라고 하기에는 거의 구타에 가까운 파워가 느껴져서 많이 아팠다.
힘 조절을 좀 못하면 어때요.
너무 고마운 나의 천사님.
곧 끝나요.
고마워요.
조금만 살살…
천사님 덕분에 아직 남아 있던 작은 것들까지 순서를 지켜 밖으로 나와주었는데, 1차에서 먹은 치킨과 치즈볼까지 만나고 나서야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술만 마시면 꼭 이렇게 토를 하게 되고, 토를 기분 좋게 끝내고 나면 팔도 다리도 풀려 해파리처럼 변하지만, 시력과 청력이 좋아지는 참 쓸모없으면서도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어서 정신을 차리고 천사님께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 몸에 힘을 주고 고개를 들어 천사님을 바라보았다.
...
마동석이 서 있었다.
...
편의점 형광등이 너무 강해서 역광으로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그 실루엣과 살기는 분명 성난 황소나 범죄도시의 마동석과 같았다.
조금 전 나의 천사님은
지금 보이는 이 마동석이었나?
실망과 두려움에 제습기 약하게 틀어놓은 듯 미세하게 온몸이 떨렸다. 취한 상태에서 급하게 쫄았더니 이제 헛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동석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유리병으로 내 머리를 찍으려고 팔을 휘둘렀는데 나는 깜짝 놀라면서 급히 피하느라 뒤로 한 바퀴 굴러버리고 말았다.
마동석은 매우 거칠게 삼다수 한 병을 따서 내 손에 쥐여주고 있었다. 마동석은 솥뚜껑 같은 큰 손으로 내 등을 어루만져 주며 시골에 계시는 외할머니처럼 다정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
분명 마동석은 친절한 목소리로 나의 안부를 물었지만 내 귀에는 “어이. 괜찮냐고. 대답 안 해? 이 찐따 씨발새끼야.”라는 환청이 들렸다.
“넵! 네넵! 저는 괜찮습니다!”
육군 병장 전역 이후로 가장 격식을 갖춰 큰 목소리로 대답한 것 같았다.
“아직 속 안 좋아 보이는데, 더 두드려드릴까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내가 여기서 마동석의 두드림을 더 받는다면 음식 외에도 내 신체 일부가 밖으로 튀어나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느 공중 화장실 벽에 네임펜으로 또박또박 적혀 있던 건강한 신장 사고파는 손글씨 전화번호도 떠올랐다.
삼다수를 마시며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편의점 간판을 확인했다. 내가 여기로 왔었던 기억이 살아났다. 테이블 주변에 널브러진 소주병과 미니 약과 봉지를 보았다. 이것도 역시 내가 먹은 것이 확실했다. 골뱅이 캔부터 필름이 끊긴 것 같은데 끊긴 필름 뒷부분에 처음으로 붙은 기억은 분명히 천사의 목소리였는데 왜 천사는 보이지 않고, 마동석은 나에게 삼다수를 주었는가?
저 마동석이 천사의 목소리를 내었는가?
아주 큰 천사로구나.
손도 크고 모든 것이 큰 천사가 있었구나.
이런 쓸데없는 환상에 빠지고 있던 순간, 편의점의 문이 열리고 엄청난 형광등 빛이 밖으로 쏟아졌다. 그 사이로 천사의 모습이 보였다. 분명히 내 지갑을 찾아 준 천사님이셨다. 천사님은 방금 구입한 것으로 보이는 여행용 티슈를 가지고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저기요, 여기 휴지요.”
나는 휴지를 받았다.
포장을 찢어 휴지를 꺼내서 입을 닦았다.
천사님은 내 곁에 오래 있어 주지 않았다. 뒤를 돌아 걸어간 천사는 마동석의 곁에 멈춰 섰고 둘은 손을 잡았다. 더욱더 강하게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악마와 천사가 손을 잡고 서 있었다. 나는 악마가 준 삼다수를 마시고 천사의 손길이 닿은 휴지에 입을 닦으며, 만약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다면 내일부터 당장 종교를 하나 가지겠다고 생각했다.
삼다수 덕분인지 여전히 술김이지만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고, 시력과 청력은 일반인 평균을 능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고마운 두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보려고 노력했다. 하필이면 두 사람이 서 있는 방향이 여전히 편의점 형광등에 완벽한 역광 처리가 되어 실루엣만 보이고 있었다.
바로 그때. 내 뒤에서 불법 유턴을 위해 크게 돌던 차량의 강력한 헤드라이트가 두 사람의 얼굴을 잠시 비추고 사라졌다. 나는 역광을 이겨내고 천사님의 눈을 아주 잠시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짧게 누군가의 눈을 본 것은 아주 오래전 기억과 비슷했다. 나는 천사와 눈이 마주쳤다.
장마노랑우비광년 006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