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일기
심—심——한 하루다.
바삐 돌아갔던 저번 달을 보내고 나니, 조금 숨통이 트였달까. 회사에서 짬이 나는 시간에 생산적인 일을 하면 좋을 텐데 현실은 팟캐스나 음악을 들으며 인터넷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다. 북마크 해놓았던 (= 놓치고 싶지는 않고 그 순간 읽을 시간이 없거나 귀찮았던) 기사나 글귀들을 마저 읽는다.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다, 자극도 받았다가, 눈으로만 스윽보다 말았다가, 그랬다가 왔다갔다 하다 보면 또 심—심——하다.
얼마 전부터 브런치에 글들을 (일기를 가장한 생각정리) 올리면서 옛 추억에 잠길 때가 많아졌다. 사진도 들춰보고. 예전 이메일도 다시 읽어보고. 일주일 전, 두 달 전, 삼 년 전, 그렇게 쭉쭉쭉 타임머신 탄 기분으로 과거로 가고 가고 가다 보면 결국 싸이월드다. 배고픈 나의 감성을 단박에 채워주는 감성창고 같은 곳, 내 보물창고. 무튼, 싸이월드를 뒤적이는데 내가 써놓은 글이 내 것 같지 않고. 내 얼굴이 무지 낯설게 느껴졌다. 21살 적의 나는 너무 빵긋빵긋해 보여서 참 예쁘네 — 예쁜 나이였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통통 튀는 느낌은 이제 더 이상 찾을 수 없지만. 그래도 생각과 마음은 훌쩍 자란 거 같아. 이 세월나이가 싫지만은 않다.
예전에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던 청아선생님은. 내게 너무 많은 것을 베풀어 주셨었다. 어린 마음에 왜 선생님은 나에게 이렇게 잘해주지? 하고 감사하다는 말로 쭈뼛쭈뼛 내 마음을 전하니. 선생님은 아주아주 나중에 내가 어른이 되면 인생의 후배들에게, 혹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그때 가서 베풀면 된다고 말씀해 주셨었다.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몰랐는데. 쬐금 더 나이가 드니 조금은 알 것 같다.
베풀 수 있는 넉넉한 마음. 베풀었던 마음에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 그 마음들이 돌고도는 세상. 그래서 지구는 둥글다. 뭐 이런저런 이치들. 세월나이가 알려준 것들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도움을 주는 것만큼 도움을 청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
사실 이 부분은 이제와서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워낙에 혼자서 하는 게 편하고, 익숙하고, 습관이 되어버려서 잘하지 못했던 부분인데. 혼자서 다 해결하고 짊어지는 게 능사는 아닌 것 같다. 이제라도 마음을 먹었으니, 연습을 꾸준히 해봐야겠다.
1983 폴더에 쌓여있는 일기들을 읽다 보니 초심을 많이 잃었구나 싶다. 나이가 들면서 얻게 되는 게 있는 것 만큼 처음마음도 그만큼씩 잊혀져 간다. 처음 그 마음을 잃지 않는 것 — 이게 제일 어려운 거 같은데 다시 한번 다짐하며 마음을 다잡아 보기로 한다. 한가한 금요일 덕분에 사무실에서 얻어가는 또 다른 귀한마음이다. 그래서 오늘은 심심하지만, 심심해서 더없이 좋은 날이다.
이천십육년, 유월 십칠일, 금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