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촌요구르트 연속 인터뷰(3)_김연옥 말하고 호호동호 정리
평촌 목장 김연옥(75) 씨는 신관호(현 홍성우리마을의료생협 이사장)씨의 아내다. 1979년 소를 키우기 시작해서, 2000년대 초에 요구르트를 개발. 지금의 평촌요구르트 기틀을 마련한 장본인이다. 필자가 '돼지 세 마리' 키운 이야기로 책을 낸다고 하자, "돼지 세 마리 키운 게 책 한 권이면, 내 인생은 대하소설이여"라는 말을 했다. 그 말로부터 이 인터뷰는 시작되었다.
내가 책을 써도 일 년에 몇 권씩 쓴다고 하잖아. 다 생생햐. 어제일 같아. 시집오는 날부터 오늘날까지 다 기억해. 처음에 요구르트를 팔려고 시작했던 건 아녀. 식구들 먹이려고 했지. 최 루미 씨가 갓골어린이집 원장이고 선주(딸)가 거기 선생을 했어. 봄만 되면 어린이들이 목장에 견학을 많이 왔어. 근데 간식으로 요구르트를 사 왔더라고. 아이들 열 명이 먹을걸 김치통에 사 온 거야. 어디서 났냐 물어보니 사 왔다는 거야. 그때 우리 우유를 가져다가 요구르트를 만드는 사람이 있었어. 사 왔다니까 내 마음에 소외감이 드는 거야. 우유는 우리 우유인데, 이거를 사다 먹는다고 하니까. 그때 팔 걸어 붙인 거야. 이건 내가 해야 한다. 어린이집 바람에 열정을 올렸지. 내가 은근 이상하게 욕심이 있어.
부엌에 솥단지 걸고 밤새 요구르트 만들어서 김치냉장고에 넣어 보관했어. 요구르트를 자꾸 만드니까 밀리잖아. 병이 없어서 김치통에 담고, 스텐 밥통에 담고. 우리 집 스텐 반찬통 그때 다 도망갔어. 이 아저씨한테 밤에 우유 끓이는 걸 시키기도 했는데, 우유가 끓으면서 나는 냄새가 단거야. 잠이 솔솔 와. 아저씨는 자꾸 졸아가지고 우유가 넘쳤다고. 아이고. 그러면서 노야(손주)가 아토피가 있어서 준수(아들)가 목장을 유기농으로 전환한 거야. (신준수 씨는 요구르트 가공을 했기 때문에 유기축산을 시도해 볼 생각을 했다고)
유리병을 사서 거기에 요구르트를 담았어. 열 통씩 담아서 아는 사람마다 붙여줬어. 팔지는 않고. 서울 어느 아파트에서 시동이 걸려서 맛있다고 부쳐달라고 하더라고. 그렇게 한 집 두 집 하다 보니까 여남은 집 되더라고. 그 많은 양을 어따하겠어, 솥에 해가지고 어떻게 당햐. 준수가 안 되겠다 싶으니께, 솥을 큰 놈 하나 사 가지고 축사 앞에다 두고 끓이더라고. 10킬로 이상. 그리고 발효시켜가지고 하다 보니께 이십 박스 열 박스 나오는데 감당을 못하잖아. 안 되겠다 싶어 가지고 2003년 겨울에 준수가 옆집 정연동 씨랑 이 공장을 지었어. 셋이서 눈 펄펄 내릴 때였어. 평수 100평을. 그리고 2004년에 가공 허가를 받았어.
그때 10억 빚을 졌어. 공장 짓고도 꼬라박았어. 축사도 다시 지었어. 유기농 한다고 3년 전환기 갖고 소도 줄이고 하면서 빚이 커졌어. 공장 짓고서 떡하니 솥을 걸어놨는데, 요구르트가 이십 병, 삼십 병 나가서 간에 기별이나 가냐. 생협에서도 달라고 하더니 짹 가져가 봐야 40병 가져갔어. 500미리 유리병으로. 그리고 없어. 촌에서 누가 요구르트를 사 먹어. 플랜카드도 걸고, 시식회도 다니고 했어. 사람만 모였다 하면 나갔어. 갓골어린이집이 최고였어. 최 루미씨가 많이 홍보해줬어. 어디만 가도 꼭 싸갔어. 잘해줬는데, 말 한마디도 안 해봤네.
초기에는 병을 다 회수해와서 닦아 썼어. 지금 같으면 못살아. 그때 죽었지. 사람 목숨이 아무튼 질긴 거야. 지금 일하는 거 암것도 아냐. 병원에 디스크 때문에 두 달 입원했다 돌아오니까 병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어. 사람들이 요구르트를 파 처먹고 병이 썩거나 마나 잠가서 그냥 보낸다고. 속을 닦아서 스팀 살균기에다 넣어야 해. 그러고도 드러운 건 빼고. 그렇게 2년인가 3년을 했어. 낮에는 젖 짜가면서. 밤에 병 닦으면서 졸기도 하고. 다 닦아서 엎어놓고 아침에 찜기에 넣어서 살균하고 아이고. 그래도 어렵다고 해도 안 팔리는 게 웬수야.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게 별 게 아냐. 그만큼 고생을 했기 때문에 오늘이 온 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