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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목장을 시작하던 마음

평촌요구르트 연속 인터뷰(2)_김연옥 말하고 호호동호 정리

by 호호동호


1979년 목장을 시작하고, 요구르트를 개발한 김연옥 씨(75). 그녀는 신관호(홍성우리마을의료생협 이사장)씨의 아내다. 필자가 '돼지 세 마리' 키운 이야기로 책을 낸다고 하자, "돼지 세 마리 키운 게 책 한 권이면, 내 인생은 대하소설이여"라는 말을 했다. 그 말로부터 이 인터뷰는 시작되었다.

관호 씨와 연옥 씨는 중매로 만났다. 관호 씨는 중매에 나가 연옥 씨에게 세 가지 조건을 말했다고 한다. 본인은 교회에 다닌다. 부모님을 모시며, 시골에 살겠다. 그래도 괜찮으면 결혼하자고. 이야기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관호씨가 세 가지 조건을 말했다는 게 사실인가? 그런 거 저런 거 따질 거 없어 내가 좋으니까 왔어. 여기 완전 촌이었어. 시골로 시집 올 생각했남. 도시에서 살 생각을 했는데, 콩깍지가 씌웠으니까 여기까지 왔겠지. 그냥 좋아. 시골이 좋아서 여기로 왔어. 봄에 서울에서 처음 보고 여름에 내가 (홍성에) 잠깐 왔다 갔어.


처음에 딱 들어올 때, 지금은 길이나 좋지. 집도 그렇고 아이고 전부 흙바닥이고 아유 나 진짜. 등 너머로 걸어 돌아왔지. 나 올 때는 하얀 샌달에 빨간 미니스커트에다 그렇게 입고 왔거든. 노인 양반들 둘(시부모)이 있더라고, 칠십된 노인 양반. 나는 완전 젊은 여자여. 저이 어머니는 허리가 바짝 꼬부라졌어. 부엌에도 못 댕길 정도로 늙었어. 들어온 순간부터 '내가 요놈의 집구석을 어떻게든 반짝 들어서 일궈내야겠다'는 집념이 꽂힌 거야. 이 집이 너무 가난했어. 다른 거는 소용없어. 예수고 뭐 그런 게 어딨어. 그냥 오로지 이 집을 살린다. 그거만 생각하고 살았어.


중매해준 사람하고 5년을 같이 살았어. 저이 누나가 중매를 섰어. 누나네하고 영등포에서 한 셋집에 살았어. 그러다 내가 이사를 갔어 맥주공장 뒤로다가 이층 집에. 한 달인가 사는데 저이 누나가 또 이사를 온 거야. 안방이 주인집이고 우리 집이 옆방이고 옆에 방을 얻어가지고. 오는 줄 몰랐지. 그때는 그 정도로 친하지를 않았거든. 그 양반은 벤또 장사를 했어. 공사판에 다니면서 그리고 닭집을 했어. 생닭집 하다가 흑석동 가서 짜장면 집을 했어.


그래서 중국집에서 선 봤어. 자장면 먹으면서. 저이 누이가 무조건 오라고 했거든. (중매 보는데 짜장면은 적당한 음식이 아니었다는 신관호 씨의 충고) 5-6개월 됐나? 봄에 선보고 10월에 시집왔나 보다. 나는 양복 한 벌 맞춰주고 시계 최고 비싼 거 만 오천 원짜리 시계 맞춰줬는데, 저이는 시계 오천 원짜리 맞춰줬어. 돈이 없으니께. 시곗 방에서 시계를 딱 놓고서 오천 원짜리 이상은 고르지 말래. 내가 희생하러 들어왔어 애초 처음부터. 호강하고 덕 보러 살러 온 게 아니라 내 몸을 희생하러 왔다고. 시집와서 악착같이 살았지. 저 양반이 악착같이 안 살고. 지금 많이 좋아진 거여 이 정도면.


그래도 복은 있어 그렇게 살고도 잘 살잖아. 일 잘한다고 잘 사는 건 아녀. 마누라 잘 얻어서 그래. 마누라 덕이지. 하나는 그냥 살고 하나는 악착같이 앞만 보고. 나 요새도 악착같이 일해. 암만 뜨거워도 안 놀아. 그렇게 사는지만 알았어. (1980년, 관호 씨가 사우디아라비아로 건설 노동을 하러 갔다.) 내가 가라 했지. 준수 첫돌 날. 준수가 가을에 9월 5일 생일이거든. 눈물도 없었어 가난하게 사니까. 빨리 가라고 했지. 그리고 내가 애들 셋, 어머니 하나 네 식구 거느렸다고.


사우디 가면서부터 빚 있는 거 싹 갚아버리고. 집 앞이 밭이었어. 밭을 파서 논을 만들었어. 쌀이 부족해서. 거기다 샘 하나 팠지. 그러면서 빌렸던 돈 갚고 송아지 사들이기 시작했지. 채승병 씨 오도바이 뒤에 타고 다니면서. 천북으로, 어디로 젖소 있는 곳 다 갔지. 그때는 젖소 송아지가 뱃속에서 떨어지면은 백오십만 원이었어. 사우디에서 한 달에 사십만 원 벌었어. 그때 송아지가 엄청 비쌌어. 큰 거 있잖아 젖 짜는 거. 사백, 오백 했어. 우유 초창기에는 괜찮았지. 돈이 다달이 들어오니께.


기적이여 기적. 나는 지금 사는 게. 내가 부처님이야 (웃음). 우리 집 환경이 180도로 바꼈으니까. 나는 낮에는 김치 담고 빨래하는 걸 해보질 않았어. 시집와서 다 밤에 했어. 옷도 치마 뜯어가지고 몸빼 해 입었어. 옛날 한복 치마를 잡아서 월남치마라고 해서 입다가 다시 부셔서 가랭이 만들어서 몸빼를 만들었어. 그렇게 살았어. 옷도 안 해 입으니까 돈이 안 들어갔지. 가난하니까. 친정에도 일 년에 한 번 갈까 말 까야. 돈이 있시야 가지.


보리 심어서 반 매상하고 반은 먹고. 소는 강수(첫째)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샀어. 난 아찔해. 어떻게 살았나. 소를 키우면서 일어났지. (사우디 파견 노동) 일 년을 했는데, 돌아오기로 한 날 한 달 전부터 맨날 편지 보냈어. 꼬부랑글씨 쓸 줄도 모르는 거 쓰고 해서 붙이고 붙이고 했지. 일 년만 더 있다 오라고 했어. 일 년 더 있다 왔어도 돈은 호되게(많이) 안 남았어.


우리 동네 둘, 화신리에 둘이 갔어 사우디. 우리가 제일 꼴찌로 돌아왔지. 어떻게 햐 내가 죽겠는데. 고생하는 김에 일 년 더 고생하라고 했지. 돌아왔을 때 반가우셨어요? 반갑기보단 어떻게 사나 싶더라. 돈이 안 나오잖아. 사람이 왔으니까. 뭐가 반가워. 돈 벌러 갔다가 왔는디. 돈을 벌어야지 반갑지. 사람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반가운 거 소용없어 우선 돈이 있씨야지. 맨날 다달이 돈 들어오던 게 돈줄이 딱 끊어지잖아. 내가 지금 사는 게 살다가도 몸서리 나.


소가 먹어야 하니께. 소 사료 사 먹이는데 돈 없으면 못 먹여. 소 세 마린가 젖 짜기 시작하니까 한 달에 돈 백만 원씩 나오더라고. 내 기억에는. 하여튼 다 부자라고 했어. 안 나오던 돈이 나오기 시작하니께. 이 동네 일곱 집이었어 목장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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