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 이어짐)
하지만 봄은 오고만 것이다. 이곳저곳 꽃이 피니,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힘든 시절이 언제 있었냐는 듯, 모두 잊고 텃밭으로 향했다. 강아지처럼 흙을 파대고 밭을 만졌다. 시간이 나면 매일 조금씩 위치도 바꿔가며 예초기를 돌렸다. 풀과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고, 이 좋은 날이 영원할 것 같았다. 겨울과 다르게 집에 머무는 시간이 적어지니 집은 문제 없어보였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 나는 꼭 일을 조금씩 남겨두었다. 한조각 케잌을 남겨두는 모습이랄까. 금방 다시 몰입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금방 돌아와 해낸 일들도 있다. 문제는 곧바로 해내지 않은 일들이었다. 일례로 이런 일이 (지금도) 있다. 타일 작업을 할 때는 타일과 타일 사이에 줄눈을 넣게 되어있다. 타일과 타일 사이는 틈이 생기기 마련인데, 이 틈을 메꿔주지 않으면 물이나 이물질이 타일 사이로 들어간다. 문제는 물인데, 물은 타일 본드를 물러지게 하고, 마지막으로 타일이 떨어지게 만든다.
그러고 보니 현관 타일 사이에 줄눈을 넣지 않았다. 집안에 물에 젖은 신발이 들어올 일이 있겠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신발은 물귀신이었다. 겨울에는 신발에 눈이 붙어 들어오기 마련이었고, 비에 젖은 장화는 비 오듯 땀을 흘렸다. 그래서 나는 신발을 밖에다 벗어두고 들어오는데, 그러고 나면 밤새 신발들이 눈, 비에 젖는 것이었다. 이런 사연을 모르는 짝꿍은 내게 왜 바보 같이 구냐며 이유를 물었는데, 나는 그 이유를 부끄러워 말은 못하고...신발도 울고 나도 울고...
실리콘은 면과 면 사이를 깔끔하게 만들어주는 마법의 재료다.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이 현재 계신 곳이 집이든 공장이든, 전철이든 카페든 어느 벽면을 쳐다보더라도 그곳에 실리콘이 있을 확률이 99%. 실리콘은 다방면에 유용하게 쓰인다. 실리콘의 핵심 기능 하나는 방수기능. 말 그대로 물의 침투를 막는다. 나는 하필 욕실 실리콘을 바르다 말았다. 물이 가장 많이 쓰이는 장소에 실리콘을 쏘지 않은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쓰긴 했다. 조금 남겨둔다는 것이 그만... 딱 한번만 더 바르면 됐다. 먼저 바른 실리콘은 나중 실리콘을 기다리다 지쳐 색이 누레졌다. 나는 그저 우리 집은 괜찮을 것이라는 미신에 가까운 신앙 생활이랄까..
머리로는 항상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미제 사건은 눈에 너무 잘 보이는 곳에 있었다.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헤어지고도 마주칠 수밖에 없는 캠퍼스 커플 같은 관계랄까.
누워서 떡먹기일 거라 믿었다. 마음만 먹으면 다시 시작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금 한창 불이 붙었으니, 잠깐 일시정지일뿐이다, 금방 시작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차갑게 식은 떡을 먹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인간이 고작 한번 해본 일을 오래 기억할 수는 없었다. 망각은 모든 곳에 마수를 미쳤다. 이 망할 재료가 도대체 어디로 간거지? 사라진 재료들을 찾느라 또 한세월이 걸리게 되었다. 이걸 다시 시작하려니, 꽤 큰 마음을 먹어야 했다. 애초 마무리를 했으면 됐을걸.. 이렇게 된 거 도피 생활을 즐기기로 했다. 회피 생활은 꽤 달콤했다. 그러다 된서리를 맞았다.
경종을 알린 사건은 차단기가 내려가면서 시작되었다. 일명 두꺼비집이라 불리는 곳에 자리한 누전 차단기. 이런 일렉트로닉한 장소에 왜 두꺼비가 살게 된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그것은 퇴근하고 돌아와 샤워를 하던 중의 일이다.
저녁이 한창 준비되던 시점이다. 전기밥솥은 한껏 압력을 올리던 중이었고, 인덕션은 프라이팬의 기름을 달구고 있던 때였다. 두 대의 전기온수기는 각자의 물을 덥히고 있었다. 하나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샤워를 하고 있는 나의 온수를 데우고 있었고, 또 다른 온수기는 샤워를 마치고 나올 방을 따뜻하게 덥히고 있었다. 겨울 냉기는 들어올 틈 없는 열기였다.
"푸쉭-!"
전기가 끊어졌다. 분주함을 멈추게 하는 암흑이 시작됐다. 하필 머리를 감는 순간이었다. 보이는 것은 없었지만, 무슨 일인지 알고 있었다. 그렇다. 작년 겨울에도 몇 차례 차단기가 떨어졌다. 차단기가 전기를 끊어버리는 것인데, 설정한 전기보다 많은 전기를 사용하는 순간 차단기는 떨어졌다. 누전이 되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집에 정적이 흘렀다. 전기 펌프로 공급되는 물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차단기만 올리면 전기는 다시 들어온다. 문제는 차단기가 200미터 밖에 설치된 것. 하던 샤워를 중단하고 옷을 입는다. 집 밖으로 출발. 엄동설한이지만 말 그대로 자업자득이다. 차단기 용량을 20A(암페어, 전기량을 나타내는 단위)에서 30A로 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몇 천 원짜리 차단기를 사서 바꿔 끼면 되는 일이었다. 전기 작업을 해야 한다는 쫄깃한 두려움은 있었지만... 이게 머리가 젖은 채로 밤길을 다녀오는 것보단 열 배쯤(열 번쯤 왔다 갔다 하면서 깨달은 교훈)은 낫다는 것은 확실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