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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플랜B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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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동호 Aug 10. 2023

경칩_깨어난 포스

경칩

살아있다! 


아직 한겨울이지만, 꿀벌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니 기쁘다. 나는 당장 벌통 뚜껑을 열고 '고생했다, 얘들아! 내가 한턱 쏜다!' 하고 꿀물 스프레이 한번 퓩퓩- 뿌려주고 싶지만… 안 된다. 경망스러워서는 안 된다. 개구리 깨어나는 봄이 올 때까지 참아야 한다. 아직 봄이 오려면 한 달은 넘게 남았다. 겨울이 길게 느껴졌다. 벌통 속에 전열판을 넣어 따뜻하게 해주는 방법도 있다고 하는데,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 벌들에게 마음으로 응원을 보낸다.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이 됐다. 유튜브 여기저기에서 '봄벌 깨우기'를 했다는 썸네일이 올라왔다. 봄벌 깨우기는 겨우내 활동을 쉰 벌들에게 봄 준비를 시키는 것이다. 봄은 우리나라 양봉에 가장 중요한 시점이다. 양봉가들은 아까시 꽃이 피는 시기에 맞춰 봄벌 계획을 짠다. 아까시 꿀은 국내 꿀 생산의 70퍼센트를 차지한다. 때문에 양봉가는 아까시가 피는 날을 거꾸로 계산해서 꿀벌의 세력을 최대로 만든다. 세력은 일벌(채집벌)의 숫자가 얼마나 되느냐를 말한다. 늙은 채집벌도 아니고 젊은 채집벌이 가장 많은 시점이어야 한다. 


벌통은 20여 일 주기로 세력이 변한다. 20일은 알이 일벌로 우화 하는 시간이다(정확하게는 21일). 20여 일 단위로 변하는 이유는 알을 키우는 유모벌 차이 때문인 것 같다. 알을 낳는 것은 여왕벌이지만, 여왕벌은 무조건 알을 낳는 게 아니다. 시녀벌의 안내에 따라 알을 낳는다. 시녀벌은 벌통 바깥에서 꿀과 꽃가루가 얼마나 들어오느냐를 참고한다. 먹을 게 많을 때 식구를 늘리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이게 인간이 당액(설탕물)과 화분떡(꽃가루 반죽)을 넣어줘서 착각을 일으키는 게 가능하다. 
 

알을 얼마큼 낳을지 결정하는 데 벌이 고려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유모벌의 수다. 유모벌은 일벌이 가장 어릴 때 맡게 되는 역할이다. 꿀벌은 나이에 따라 맡는 역할이 달라진다. 태어나자 마자는 자신이 태어난 방을 청소하고 어린 동생들(애벌레)에게 밥을 주고 온도를 유지한다. 유모벌이 돌볼 수 있는 애벌레 수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봉군은 유모벌이 있는 만큼 알을 낳는다. 결국 처음으로 돌아와서, 겨울을 견딘 후 봄벌을 깨울 당시 벌이 얼마큼 있는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봄벌을 깨운 후 20여 일 후에, 첫 벌이 태어난다. 그 벌들이 유모벌이 된다. 이 숫자만큼 꿀벌 마을은 알을 낳는다. 처음 한두 마리 차이가 세대를 거듭할수록 격차가 눈덩이처럼 커진다. 


벌들의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봄벌 깨우는 법을 알려줄 테니 오라고. 봄벌 깨우기를 하기에 좋은 날씨는 기온이 10도 이상, 구름 없이 해가 쨍한 날이어야 한다. 작은 온도차이도 벌들에게 큰 차이고, 한두 마리를 잃는 것이 앞서 말한 큰 차이를 빚기 때문이다. 깨운다니. 드디어 시작이다(그렇다. 새로 산 가죽장갑과 샛노란 방충복. 양봉용품을 사용할 시간이 왔다). 약속한 시간이 되었다. 차를 타고 시동을 걸었는데, 벌들의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구름이 꼈으니 날을 다시 잡자고. 기다리던 운동회가 취소된 기분이었다. 하늘에 있는 구름은 겨우 조각구름 같은데 연기라니. 인내심은 늘 마지막이 어렵다. 발동이 걸렸는데 약속이 미뤄지니 엉덩이가 근질거렸다. 우리 벌들이 어떤지 보고 싶어졌다. 흥분은 될 일도 그르친다고, 참는 게 좋겠다.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모든 조건이 좋아 보였다. 따뜻한 날이었고, 맑았다(비는 안 오니까). 우리 봉순이들을 향해 뛰어갔다.


벌통을 덮고 있는 상자 속을 들여다보았다. 벌통은 조용했다. 싸늘한 벌통 앞에는 꿀벌 시체가 쌓여있었다. 수북하게.. 끄어... 최악의 상황이 생각났다.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 꿀벌 아포칼립스. 역시 너무 습했던 거니. 내가 초보라 그러니. 이제 봄이 왔는데. 믿을 수 없었다. 덮개 상자를 걷었다. 벌통이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벌통에는 아무 소리도 없다. 훈연기고 뭐고 바로 벌통 뚜껑을 열었다. 뚜껑 속 비닐과 신문을 벗기기 시작했다. 한 장, 한 장..  마지막 비닐까지 벗겨도 벌집은 조용하다...


오래전 이사 나간 헌 집처럼 싸늘한 벌집. 끝까지 희망을 버릴 수 없었다. 벌집 사이를 들여다보았다. 살아있다. 어떤 소리도 없이 봉순이들이 꼬물거리고 있었다. 동그랗게 모여 몸을 덥히고 있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차올랐다. 얼마나 살아남았는지, 숫자는 중요하지 않았다. 바라고 바라왔던 만남이다. 지난겨울에 희망을 알리던 날갯짓 소리. 조그맣지만 불씨가 살아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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