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길게 온다. 이미 6월에 장마는 지났는데, 다시 장마가 왔다. 사흘 쉬고 삼 주째 비가 내리고 있다. 참 긴 가뭄이었다. 지난해 겨울부터 반년 가까이 비가 오지 않았다. 메마른 땅에서 자라지 못하고 타들어갔던 작물들이 이제는 물에 잠겨 녹아내린다. 이제 꽃을 피웠다 싶은 참깨 꽃이 처량히 비를 맞고 있었다. 꽃이 피어있을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는데, 비가 이렇게 계속 와서 제대로 열매를 맺을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다. 국내산 참깨만 유통하던 '한살림' 소비자생협이 국내산으로는 더 이상 수급이 어려워 부득이 수입산 참깨를 한시적으로 들여온 건 2021년의 일이었다. 예정된 생산량의 10퍼센트만 생산되었다고 한다. 대서는 가장 더운 시기를 말한다. 조상들은 이 시기를 초복과 중복, 말복 세 번으로 나누어 더위를 넘어가고자 했단다. 덥다는 건 햇볕이 강하다는 뜻인데, 이는 식물들에겐 가장 좋은 시기다. 그래서 지금 오는 비는 작물 생장에 지장이 크다. 농사로 인해 인류가 정착할 수 있었는데, 이제 농사는 예측불가능한 일이 되는 것 같다.
비가 오면 집에서 쉴 줄 알았는데, 비가 오는 와중에도 벌들은 벌통을 떠난다. 정찰벌만 떠나는 것인지 채집벌도 떠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돌아오는 벌들은 화분 주머니에 꽃가루를 담아 비에 젖은 착륙판에 내려앉는다. 나가고 돌아오는 수가 적은 걸로 보아 정찰벌만 떠나는 것 같다. 나이가 많은 꿀벌은 생의 마지막에 정찰 역할을 맡는다. 꿀벌은 나이가 들면서 역할이 바뀐다. 나이 많은 벌은 노련하면서도 생의 마지막이기에 가장 위험한 일을 하게 된 것 같다. 비에도 밖을 향해 날아가는 벌들의 모습은 멋지면서도 결연스럽게 느껴진다. 나이 많은 벌들이 이런 궂은 날씨에도 나가는 이유는 뭘까. 유전자에 새겨진 코드이기 때문에? 새로 태어날 후배들을 위해서? 이런 궂은 날씨일수록 꿀과 꽃가루를 찾는 경쟁자가 오히려 적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꿀벌들에게 이런 날은 집에서 쉬라고 말리고 싶지만 꿀벌들은 추운 날씨든 비가 오는 날씨든 벌통을 나간다. 벌통에 꿀이 가득하면 나가지 않을 것 같았다. (수집 활동이 줄어든다고는 한다) 그래서 긴 장마가 온다는 예보를 듣고 이번 봄에 채집된 꿀을 채밀하지 않았다.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면, 멀리 가지 않아도 되게 하는 것은 어떨까. 벌통 가까운 곳에 꽃밭을 만들면 벌들이 멀리 나갈 필요가 없지 않을까. 지난 겨울과 올봄, 두 차례에 걸쳐 클로버 씨앗을 뿌렸지만 가뭄 동안 잘 자라질 못했다. 지난 달에는 늦여름을 위해 메밀을 뿌렸다. 메밀꽃꿀은 벌들의 농약 피해의 해독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농약에 중독된 꿀벌들은 혀를 내밀고 죽었다. 죽은 벌을 보면 지난 가을 갑자기 텅 비었던 벌통 생각이 났다. 일벌들은 없고 여왕벌만 벌통에 남았다. 농약 중독을 해독한다는 말이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메밀은 싹도 빨리 돋아 열흘 전에 뿌린 씨가 벌써 한 뼘 길이가 되었다. 검은등말벌이 꾸준히 찾아오고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직은 크기가 작고 사냥기술이 미숙해 꿀벌을 한번에 채가지는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