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벌이 들어온 후 달라진 우리 집 동물 이야기_2편
우리 집 둘째(동물)는 흑염소다. 살아있는 예초기이자 걸어 다니는 퇴비살포기. 인간에게 길들여지지 않는 절개 있는 야생성의 상징, 간혹 훔쳐먹는 음식마저 종이 박스인 완전 채식주의자. 어디를 보고 있는지 초점을 읽을 수 없는 눈. 수년을 관찰해 본 바로 염소는 인간과(최소한 나와는) 교감하지 않는다. 염소를 키우는 것은 텃밭 모든 곳에서 무한 생장하는 풀 때문이다. 예초기로 풀을 치면 쉽다. 하지만 기계를 써서 풀을 베는 것은 자원과 시간을 쓰는 소진하는 느낌인데, 염소가 풀을 먹으면 생산적인 기분이 든다. 하지만 문제는 염소도 고집이 있다는 점이다.
선한 목자가 되기 위한 관문인 건지, 염소의 고집은 푸른 초장에 뉘이려는 목자를 매일 시험한다. 나는 풀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려 하고 호락호락 갈 수 없는 염생이와의 실랑이는 아침마다 반복된다. 결국 염생이는 끌려가는 목줄에 목이 걸려 기침을 콜록이고 콧물이 나오는가 싶더니 눈가가 촉촉해진다. 아, 나는 지옥에 갈거야. 오늘도 나는 내 인간성을 돌아본다.
왜인지 염소는 말뚝으로부터 가까운 풀이 아닌 먼 풀부터 먹는다. 편하게 먹을 수 있는 목줄 반경 바깥 풀을 먹고싶어 한다. 그러다 보니 목줄이 팽팽해진 그곳에서 고개를 뻗고 혀를 내밀어 풀을 뜯다가 안 되겠는지 무릎까지 꿇기에 이른다. 염소를 처음 키웠을 때 무릎 꿇고 풀을 먹고 있는 걸 보았을 때는 인생의 어떤 교훈 같은 걸 생각했다. 매일 아침 다툼을 벌이는 사이가 된 지금은 그냥 미련함 정도로 보인다.
젖을 뗄 때쯤 우리 집에 온 염소는 뿔이 점점 자라 길어지는가 싶더니 일 년이 되자 완전하게 어른이 됐다. 이제 힘이 세져 나도 준비 운동을 하고 심호흡을 한 후에 목줄을 잡는다. 염소의 영역은 밭 외곽. 잡초가 가장 거칠게 올라오는 전선을 막는 역할이다. 먹지 말아야 할 풀과 먹어야 할 풀에 대한 교육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밭에 돌아왔는데 염소가 혀를 내밀고 쓰러져 있다. 며칠 전에 들개의 공격으로 염소 한 마리를 잃은 나는 순간 식은땀이 났다. 아오, 이 들개새x들 또 왔나? 다가가 상황을 살폈다. 눈이 허공을 향하고 혀가 길게 나와있었다. 목자 자격이 부족한 나 자신에게 한숨이 나왔다. 파리들도 벌써 냄새 맡고 염소 몸을 기어 다니고 있었... 파리가 아니었다.
땅벌이었다. 염소가 땅벌 굴에 가까이 간 것이다. 염소 녀석 아무 데나 들이대더니 땅벌의 경고를 보지 못한 것이다. 땅벌들은 침 세례를 주고 나서야 이놈이 어떤 녀석인지 궁금했는지, 염소 몸을 기어 다니며 탐문을 하고 있었다. 염소를 얼른 그늘가로 피난시켰다. 염소 몸에 땀샘이 없을 텐데 몸이 땀에 절어있었다. 입에 물을 넣어주고 몸에 물을 뿌려주었다. 똥고집이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짠해졌다. 살 수 있을까.
다음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염소는 풀을 뜯고 있었다. 몸에서는 윤이 났다. 죽음의 경계에 다녀온 염소의 눈은 저세상 눈빛이 되었다. 어떤 동요도 없이 허공을, 아니 세상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그 뒤로 가끔 말뚝이 뽑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염소에겐 집으로 돌아가려는 회귀 본능이 있어 멀리 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하필 텃밭으로 돌아왔다. 텃밭에 우리가 아끼는 화초를 뜯어먹었다. 저 많은 토마토와 허브가 아닌, 몇 없는 해당화와 붓꽃을 골라 먹었다. 염소는 도망가지도 놀라지도 않은 채 서서 나를 보았다. 세상 모든 것을 지켜보는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염소를 악마의 짐승으로 여겼다는 나라가 있다는데, 염소가 진정 지옥에서 돌아온 악마였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염소는 화초를 한번 더 뜯었고, 나를 보며 꼭꼭 씹었다.
염소는 꿀벌 정도는 아무것 아니라는 듯 벌통 앞에서도 태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