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오염수 방류하는 날에...
물질문명이 정점까지 왔다. 인간사회가 바란 것은 기아나 병이나 빈곤을 없애는 것이었다. 그들이 그걸 위해 강을 더럽히고 땅을 파며 나무를 베어 쓰러뜨리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업보로 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 다른 철학을 손에 넣지 않는 한, 같은 실수는 무제한으로 반복될 것이다. …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의 수가 늘어나고 많은 걸 소비해 환경을 악화시키는, 낳아준 엄마를 마치 암세포처럼 갉아먹어가는 것이다.
ㅡ 미야자키 하야오, <지브리 스튜디오> 감독
8월 24일(목) 13시, 일본 정부가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수 방류를 시작했습니다. 설마설마했던 일이 현실 되었습니다. 우중충했던 날씨처럼 마음이 우울합니다. 방사능 오염수는 되돌릴 수 없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파괴와 오염이 될 것이니까요. 누구나 조건 없이 받는 기본소득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방사능으로 오염된 바다라니, 우물에 퍼진 독처럼 기본 재난 시대를 먼저 맞으리라 생각 못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저를 더욱 무력하게 합니다.
오염수 방류를 보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걸음마 뗀 조카 세대와 뭇 생명들에게 미안합니다. 언제였다면 방류를 막을 수 있었을까요? 생각해 보곤 했습니다. 원전을 운용하는 나라는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핵에너지라는 게 원래부터 해양 투기를 전제로 운용되는 발전소였으니까요. 우린 원래도 세상을 오염시키며 편리를 누렸왔습니다. 빛과 그림자 중에 우린 빛만 보고 싶었을 뿐이지요. 일본 정부는 그것을 드러내 준 것 같습니다. 결론은 탈핵이어야 했습니다.
안이하게 희망을 얘기할 순 없다. 희망이란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함께 고생하는 것
막연한 희망이 아닌 희망을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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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책 <돼지를 키운 채식주의자>를 펴냈다. 건강한 돼지와 고기를 위한 이야기였다. 책 하나로 세상이 바뀔 거라 생각한 적은 없다. 하지만 나의 부모님은 여전히 자식을 위해 고기반찬을 준비하신다. 그래, 이런 생각을 담아두었다는 것 자체가 기대가 있다는 뜻이겠지. 책은 우연한 결과물이었다. 작가가 아니라 농부가 되고 싶었다. 직접 돼지를 키워 이웃들과 나눠먹으며 살고 싶었다. 세상을 파괴하지 않는 육식을 보았고, 작은 마을에서 작은 평화를 만들어가고 싶었다.
육식에 대한 제한 없는 접근을 우리는 발전으로 여겨왔다. 나는 이 화려한 발전을 흠뻑 누린 세대였다. 고기반찬 없인 밥을 안 먹겠다고 땡깡 부릴 수 있는 세대, "어디 중학생이 돼가지고 고깃집엘 다녀?"가 없던 세대였다. 그러다 농촌으로 이사하면서 이 화려한 무대의 뒷모습을 보아버렸다. 파리가 들끓었고, 악취에 토악질이 나왔다. 축산업은 우리가 태어난, 돌아갈, 의존하지 않고는 한순간도 살 수 없는 자연을 병들게 하고 있었다.
육식과 채식, 도시와 농촌, 자본주의와 인간. 세상을 흑과 백으로 나누고 싶지 않았다. 세상의 종말을 기도하고 싶지도 않았다. 허무주의나 쾌락주의로 시간을 보내고 싶지도 않았다. 책을 매개로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돼지는 인간에 가까운 동물이다. 사람들은 공감하고 감정이입을 했다. 도덕적 진리 앞에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우리가 서있는 시험대는 점점 더 높은 윤리성을 물었다. 비건과 채식의 차이 같은 것인데. 채식은 무조건 옳은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캘리포니아 아몬드를 만들기 위해 쓰이는 엄청난 지하수와 농약. 수정을 위해 이동하는 꿀벌의 스트레스. 단일 재배를 위해 삭막해진 생태계. 돼지를 키우며 인간과 가축의 건강한 관계를 고민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사는 변방은 이미 축사가 포화상태였다. 합법적인 축사는 물론이고 숨구멍 하나 꽂을 곳도 남아있지 않았다. 방방곡곡에서 자연 양돈을 하는 분들도 속속 문을 닫았다.
자연 양돈이라는 것은 불법인, 세상은 고려하고 싶지 않은 대상이었다. 우리에겐 채식 이상으로, 문명의 전환이 필요해 보였다. 꿀벌이 속한 곤충 집단은 절멸을 향해 가고 있다. 침묵의 봄은 이미 시작됐다. 꿀벌이 살아남는 것이 전체 곤충을 살리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2만 종에 속하는 벌 속(屬)에 우리 집 꿀벌은 겨우 1종일 뿐이다.
인류는 어느 시대보다 초밀집하여, 초 연결 사회를 이루었다. 그리고 고립되었다. 사람들은 분노로 차있고, 불안의 망망대해를 표류한다. 소유는 늘었지만 외롭고, 무력하다. 골프라거나, 낚시라거나 자연을 파괴하는 여흥이 세상 주류처럼 여겨진다. 내가 하는 주식 투자와 내가 살고 있는 노동 환경과의 상관관계를 우린 따지지 않는다.
이런 세상에 그깟 벌레 멸종 이야기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꿀벌 이야기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제 겨우 겨울 한번 지낸 취미 양봉인이 내가 평화에 대해, 환경에 대해 무슨 자격이 있다고. 사실 상위 10퍼센트의 소비가 만드는 온실가스가 전체의 70%라는 사실을 두고, 모든 개인에게 책임을 묻고 싶지도 않다.
꿀벌은 먼 옛날 육식 사냥벌에서 식물성 채집벌로 전환을 했다. 이때부터 육상 생태계는 폭발적인 다양성을 이루었다. 약육강식의 쫓고 쫓기는 관계가 아니라 특별한 관계를 만들었다. 서로 경쟁하듯 다양성을 만들었다. 이 다양성을 아름다움으로 보는 눈을 가진 지성이 나타났다. 바로 인류였다. 아름다움의 축제를 지키는 것이 세상을 구할까? 알 수 없다. 하지만 축제처럼 세상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북극곰의 마지막 빙하가 없어지는 것처럼 인류에겐 벌레가 없어지는 것이 같은 의미가 될 테니까.
노아의 방주가 도착할 곳은 어디일까? 아니 우린 이미 방주에 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기후위기라는 암초가 우리 앞에 있는 방주를. 남은 시한은 7년(2030년). 인류가 갈고닦아온 지성을 시험지를 우린 마주한 것이다. 인간이 다양한 동물을 방주에 태운 것이 아니라, 다양성 자체가 인류의 방주라는 것을 깨닫는 것부터 시작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