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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동호 Aug 24. 2021

(9) 아무래도 깔루아

페이스메이커인가 브로커인가

(앞 이야기에서 이어짐)


깔루아가 전문가이긴 했다. 편집자인 그녀는 원고 앞에서 웃지 않았다. 깔루아를 안 지 4년이 넘었지만, 글로 이야기 나누는 것은 처음이었다. 술잔을 치운 것도 처음 보았다. 그녀는 봉투에서 원고를 꺼냈다. A4용지로 60여 장. "이 정도 분량이면 괜찮네. 조금 더 채우면 되겠어." 그리고 원고를 넘겼다. "소재가 좋아. 요즘은 에세이 시대잖아." 잠시 프롤로그를 읽었다. 글의 시작이 좋고 목차도 괜찮다고 했다. 그녀는 집에 가져가서 더 읽어보겠다고 했다. 그렇게 긍정적인 '느낌'을 받은 것으로 이제 마음껏 술자리에... 아니 나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녀가 괜찮다고 한 부분, 처음 부분은 내가 생각해도 좋았다. 지금까지 그곳만 백번 수정했기 때문이다. 프롤로그는 그러니까 '수학의 정석_집합'같은 부분이었다. 문제는 집필의 집중력이 극으로 떨어지는 후반부였다. 나는 그게 걸렸다. 초보 작가의 마음이 걸리거나 말거나 깔루아 커플은 남은 주말을 즐겁게 보내고 갔다.


그랬는데... 그녀가 다녀간 다음날 어떤 전화가 왔다.

 

"창비입니다."

!!


나는 브런치북 공모전에 당선이 되었으며, 책을 창비와 내게 되었다고 했다. 깔루아는 크게 놀랐고,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역시 프로였다. 그녀는 내게 '먼저' 투고한 곳을 제치고 계약을 하는 것은 상도에 어긋난다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나와 짝꿍은 '오 역시 전문가'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깔루아는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법적 소송은 추잡스러우니, 다음 책을 자기와 내는 것으로 합의하자고 하였다. 지금 함께하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대형 출판사와 작업을 해서 이름을 알리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 같다고도 했다. 그녀의 말은 현란했고, 나는 공모전 대상을 받은 직후였다. 다음 일이야 어찌 되든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나는 그러마 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생각해 보니 원고를 건넨 이후의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깔루아가 같이 책을 내보자고 했던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내가 술을 마시진 않은 거 같은데 기억이 안나는 것이었다. 


ㅡ 반년 후, 깔루아는 진짜로 계약서를 가져왔다.


정식 출간 과정을 처음 밟아보는 내게 출간은 사막을 건너는 일 같았다. 이 끝없는 수정의 고개가 언제 끝날지, 마감이라는 오아시스에 이를 수 있는 것인지, '한글과 컴퓨터'라는 낙타는 믿을 만한 것인지 등등 말이다. 이때 깔루아의 조언은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편집자의 역할을 출간의 안내자라고 생각했다. 북두칠성 같은 존재. 그리고 이 사막은 혼자 건너는 것 같다고 느꼈다. 하지만 깔루아의 말을 들어보니, 편집자 선생님도 (이메일 너머에서) 이 사막을 같이 건너고 있는 것 같다. (물론 편집자는 두세 권 정도의 책을 동시에 건너고 있다고 한다) 


모든 결정이 (경험 많은) 출판사 주도라기보다는 작은 의견이라도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그에 맞게 정해졌다. 제목(그리고 표지)은 작가와 편집팀만의 선택은 아니었다. 출판사 마케팅팀과의 조율도 필요한 과정이었다. 제목은 책의 구성이 잡힌 중반부에 논의됐다. <돼지를 키운 채식주의자>로 정해졌다. 책은 '채식'에 관한 이야기도 일부 있지만, 완전하게 채식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지나간 일에 대한 미련일 수 있지만, 원제 <돼지를 부탁해>에 애착이 간다. 독자들에게 돼지를 부탁하고 싶었다. 모로 갔지만 아무튼 그렇게 느꼈다는 후기를 많이 들었다.


출판 과정도 조금 알게 되었다. 원고 수정이 진행됨에 따라 어렴풋이 출간 예정일이 정해졌다. 책의 출간일이 전반기인지, 후반기인지에 따라 출판사에서 책에 거는 기대치가 다르게 담겨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출판사에선 전반기에 센 책을 낸다고 한다. (<돼지를 키운 채식주의자>는 그런 정치관계(?)와 별개로 브런치와의 일정에 따라 6월 1일에 나왔다.)


깔루아는 내게 페이스메이커이기도 했다. 그녀는 내게 수정고를 보낸 후, 다음 수정고가 올 때까진 원고를 보지 말라고 하였다. 농밀한 수정 기간이었지만, 원고와 거리는 필요한 거 같다. 그리고 몇 번 더 원고를 손 볼 수 있는지도 가늠해볼 수 있었다. 마지막 즈음에는 컴퓨터 파일이 아닌 종이로 인쇄해서 수정을 한다. 이를 교정지라고 하는데, 교정지 수정은 2번을 했다. 처음 교정지에서는 큰 수정이 가능하지만, 두 번째 교정지에서는 작은 수정만이 가능하다는 소소한 팁을 얻었다. 


그래서 결론은... 아무래도 다음 책은 깔루아와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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