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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움직인 만큼 가는_건축의 시간

샌님의 작은 집 짓기

by 호호동호
귀농 8년차, 작은 집은 짓고 살기로 했습니다. 첫 열흘은 친구들과 함께 지었고, 이후 열 달을 혼자 짓고 있습니다. 5평 집을 짓기 위해 배우고, 느낀 점들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기억에 의지해 적는 탓에 두서도 없고, 정리되지 않은 글이에요. 순서도 섞여있답니다. 이해해주세요^^


우리나라에 PC방이라는 게 처음 생겼던 시절의 이야기다. IMF가 한국을 쓸어 담고 있던 즈음으로 기억하지. '나라가 망했다'는 말은 뭍 학생들을 쾌락주의에 빠트리기 충분했지. 물론 언제나 그저 공부 안 할 핑계를 찾아 헤매는 학생들에겐 좋은 기회가 온 것이지. 내가 태어나 처음 삥을 뜯긴 곳은 PC방 뒷골목이었지. 모든 학생들이 방과 후엔 PC방으로 가던 시절이었지. 칼퇴(종례가 없는 하교)해서 가지 않으면 중심가의 PC방은 만석이었어. 조금만 늦으면 으슥한 동네에 위치한 PC방에 가야 했어.


"야, 너네 이리 와 봐."


형들은 어떤 양아치 학원 같은 곳을 다니는 건지. 선생님이 있는 것인지. 멘트가 항상 비슷했지. 얼마나 갖고 다니는지, 우리의 재정 상황을 살폈다. 아마 형들의 형들이, 그 형들의 형들이 구전으로 전승해온 멘트겠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 어두운 세계의 형들을 구제해줄 많은 해법들이 있었지. 무시하고 간다거나, 소리를 지른다거나, 허세를 부린다거나. 하지만 이제 겨우 부모님은 모르는 세상을 개척해나가는 초딩으로썬 그 형들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이 정해진 운명과 같은 일이었지. 우리는 무언가에 홀린 듯 형들이 있는 골목길 그림자 속으로 고분고분 들어갔지.


삥을 뜯겨가면서도 나는 PC방을 끊지 못했어. 그때 형들에게 제대로 한번 줘 터졌으면 PC방 출입을 끊었을지도 몰라. 아, 그랬다면 나도 서울대에 갔을지 모르지. 하지만 형들의 첫 질문에 바로 주머니를 까보이는 봉사 정신 덕에 그 단계까지 가지 않았어. 나는 가진돈의 50%를 항상 양말 속에 넣어두었지. 너무 많은 돈을 숨겨두어선 의심을 살 수 있어. 돈 없이 PC방에 다니는 것은 말이 안 되잖아. 비상금이 있다는 묘한 안정감. 적당히 갖다 바치면서 느끼는 흥분. 물론 비상금이 남아있다고 PC방에 들어가선 안돼. 형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거든.


그렇게도 PC방에 가고 싶었던 이유는 스타크래프트(Star Craft)라는 게임을 하기 위해서였어. 겨우 옆동네만으로도 서부개척시대를 충분히 느꼈던 초딩에게 지구 밖 우주를 개척한다는 설정은 아주 흥미로웠지. 한정된 자원으로 결국은 전쟁을 한다는 설정이 안타깝지만, 서울대를 포기해가면서 내 유년기 갖다 바칠만한 게임이었지.


게임 속에 미래 인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종족은 '테란'이었어. 테란에겐 'SCV'라는 만능 일꾼이 있었지. 죽음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생산을 할 수 있는 캐릭터였다. 아, 에스씨브이! 튼튼하고 똑똑한 나의 조수.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황량한 우주의 어디든 나와 함께 가주었지. SCV는 무슨 건물이든 지어주었어.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건물은 완성되어 있었지.


scv.png SCV의 생김새_출처: 나무 위키

나의 집도 시간이 지나면 완성될 줄 알았어. 작고 아담한 나의 집 말이야. 시간이 지나면... 합판을 자르고, 나사를 박고, 페인트를 칠한지 어느덧 반년이 지났어. 요즘은 SCV 생각이 나는 거야. 이제라도 만약 스타크래프트를 한다면, SCV와 근로계약서라도 써야 할까 봐. 게임이 아닌 현실의 세계 SCV를 돌아본다. 그래 바로 나 자신 말이야. 현실 세계에선 바로 내가 SCV인 거야. 조그만 나사 하나를 박더라도, 건축의 시간은 손이 움직인 만큼 딱 그만큼 태엽이 움직이는군요. 완공까지 얼마큼의 시간이 더 필요한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하나씩 해나 가보면 그게 다 채워질 때가 오겠지. 그날이 오겠지. (제발)


photo_2021-11-16 21.09.38.jpeg 가끔은 야근도 하는 현실 SC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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