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은 셋집 살이로 농촌 살이를 시작한다. 지을 돈이 없다는 게 정답에 가깝지만. 처음부터 집을 짓는 것은 중매결혼보다 더 큰 위험부담이 있기 때문이다. 도시와 다르게 모든 게 연결되어있는 시골에서는 어디서 어떤 영향을 받을지 모른다. 사소한 일 같아도 삶의 질에 타격을 받는다. 경관이나, 악취 같은 오염시설이 있을 수도 있고, 매우 무례한(마을 사람 모두가 미친 x이라고 부르는) 이웃이 있을 수도 있다. 반대로 내가 그 미친 x일 수도 있다. 농담 아님. 인생 모르는 것이다... 똑똑하고 덜 똑똑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살지 않으면 모른다.
요즘은 어느 소도시에나 읍내에 원룸이나 오피스텔이 있다. 그런 집이 아니라 농가주택을 선택했다. 내 집 지을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괜찮은 농가를 구해 고쳐 살고 싶었다. 농가주택은 보통 연세로 집세를 낸다. 한 번에 1년 치를 내는 것인데, 내가 사는 동네는 120~240만 원 선이다. 가격만 두고 보면 집을 통째로 빌리는 것이기 때문에 좋은 것 같기도 하고, 낡은 집 전체를 관리한다는 게 괜한 일을 벌이는 것일 수 있다. 개인에 맞게 고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작은집을 짓기까지 7년 동안 다섯 번의 셋집을 거쳤다. 전전했던 셋집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첫 집을 구한 때는 겨울이었다. 나는 28살이었고, 이제 새로운 지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있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먼저 귀농했던 친구 집에 머물며, 셋집을 알아봤다. 읍내를 돌며 전봇대에 붙은 광고지도 보고, 부동산도 찾아갔다. 집 대문에 임대를 알리는 종이를 붙여놓은 곳도 있었다. 부동산에 있는 집은 주로 원룸이었는데, 원룸에 살고 싶지는 않았다. 농가주택을 찾아다녔다. 벼룩시장 광고를 보고 셋집을 구했다. 십여 곳의 집을 돌아본 후였다. 읍내 외곽에 위치한 집이었다. 기다란 일자(ㅡ) 형 집. 집은 주인집에 붙어있는 방하나에 부엌이 달린 집. 거리도 읍내와 꽤 가깝고, 집도 깔끔했다. 마을도 고등학교 뒤에 있어서 인지 학구적(?)인 분위기가 흘렀다.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15만 원. 살고 싶으면 2년 계약을 하던가 말던가였다. 할머니와의 첫 협상이 시작됐다. 어이 할멈, 어디서 들은 건 있는 거 같은데, 월세에 계약기간이 무슨 말이쇼. 어디서 서울 사람 코를 베려들어. 이보게 총각, 아까 먼저 집을 보고 간 사람이 있네. 시간 많으면 다른 집을 알아보게. 주인 할머니 심리전은 제임스 본드 뺨쳤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협상은 종료되었다. 2년을 채우지 않을 시 40만 원을 내겠다는 계약서를 썼다.
이삿짐은 이불뿐이었다. 짐이 없으니 집이 휑하게 느껴졌다. 시장 사랑방에 우리 집에 '없는 물건들’ 목록을 붙였다. 태국 마사지를 해드리겠다고 적었다. 냄비, 프라이팬, 접시, 그릇 식기 세트를 받았다. 전기난로와 겨울 이불을 얻었다. 전기밥솥이 생겼다. 없는 건 얻을 때까지 참는다. 고 생각했는데, 아는 사람이 늘어갈수록 살림이 빠르게 생겼다. 집은 점차 사람 사는 구색을 갖췄다. 그런데 이런 시부럴. 농가에 살아본 적 없는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시골집이라면 으레 갖고 있는 모든 문제를 이 집은 빠짐없는 풀세트로 갖고 있었다.
“시골집이 '원래' 불편 혀. 불편해도 좀 참고 살어.” 주인집 할머니가 계약서를 쓰던 날 말했다. 이사를 온 지 3주 안에 ‘원래’에 함축된 대부분을 맞닥뜨렸다. 분명 숨겨진 창문이 있지 않고서야 집 안에서 이렇게 바람이 불 수는 없는 것이야 싶은 외풍이 쳤다. 집안에 바람이 불고 있었다. 습기가 심했다. 분명 겨울인데 열대 밀림 느낌이 났다. 동굴에 살았던 인류의 기분은 이런 걸까? 한줄기 빛이 들어오는 곳이 비상탈출구였다. 실제로 창문이 작아서 아침이어도 한밤중인 것 같은 꿀잠 맛집. 하지만 직장인에겐 지각의 늪.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곳에 살고 있는 건 나 혼자가 아니었다는 사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