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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로 Mar 28. 2017

엄마가 되니, 나의 엄마를 생각한다

[삐딱한 엄마 일기 11편] 결국 아이는 저절로 큰다

우리 엄마에게는 3명의 자녀가 있다. 그리고 5남매의 장남인 아빠와 결혼해서 맏며느리가 되었다. 또한 결혼해서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시부모님과 위아래층을 나눠 쓰며 살았다. 엄마는 장난감 가게, 철물점, 칼국수 집, 고기 집 등으로 종목을 바꿔가며 30년 동안 장사를 하셨다. 명절과 제사 때마다 오 남매의 가족들은 우리 집으로 모였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아이 하나 키우면서 온갖 질병에 시달리는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삶의 무게다. 지금의 나보다 훨씬 어린 24살에 결혼한 엄마. 엄마는 첫 딸인 나를 낳았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물론, 지랄 같았던 내 성격은, 엄마의 증언에서도 나타난다. 어릴 때는 지독한 울보였다. 엄마가 궁둥짝만 들면 자다가 깨서, 질질 울며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단다. 엄마는 그런 나를 등에 업고 새벽부터 일어나 가족들 밥을 지으셨다.   


입도 짧은 탓에 모유가 나오지 않자 모든 분유를 거부하며, 그 당시 비쌌던 '거버'이유식만 고집했다는 나.(지금은 없어서 못 먹지)


조금 커서는 엄마 밉다고 책상 밑에 숨어서 눈깔사탕을 와그작와그작 부셔 먹었다는데, 지금까지도 사탕을 빨아먹은 기억이 없는 나로선 당연히 수긍할만하다.


물론 우리 삼 남매가 대단하게 잘나진 않았지만, 학창 시절 엄마가 교무실 한 번 불려 갈 일이 없을 정도로 바른 학생(?)이었다. 그렇다고 엄마가 힘들지 않았을까. 나는 아이가 막 태어나고 젖을 물리면서, 그리고 분유를 타면서, 그리고 새벽에 깨서도 문득문득 엄마를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뭉클한 마음과 육아는 별개의 문제였다. 나는 독립적인 성격의 여성이고, 처음부터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 해나가겠다는 굳은 의지를 불태웠으므로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무식하고, 쓸데없는 자존심이지 않나 싶다) 심심찮게 어른들과 부딪혔다.


엄마는 아이를 셋이나 키우셨지만, 정작 손자를 보자 그저 귀엽기 짝이 없는, 넉살 좋은 할머니가 되었다. 옛날엔 어떻게 했냐고 물어봐도, "그냥저냥 가만히 두니까 크더라"라는 고릿적 말이나 늘어놓으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무수한 날 육아에 대한 고민에 휩싸이면서, 결국 '인터넷 맘'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다. 아이에게 몇 시간마다 우유를 먹이고, 음식은 철저히 유기농으로 손수 만들어주며, 아이 발달에 따라 척척 장난감을 사다 놓는 완벽한 엄마들이 인터넷 세상에는 널리고 널렸다.


기저귀는 어떤 게 좋은지 이것저것 찾아보고, 분유는 독일 직구까지 해서 먹였다. 이유식이 시작되자 심심풀이로 쥐어주는 과자들을 죄다 유기농에, 검증된 음식만 먹였다. 그렇게 어느새 나는 '파이팅' 넘치는 엄마가 되어 있었다.


그런 나를 보면서 우리 엄마는 혀를 찼을 것이다. 하나 키우면서 허덕거리고, 유기농에 좋은 것만 먹게 하는 '쓰잘데기 없는 짓'을 탐탁지 않아했다. 옛날 엄마들의 단골 멘트인 "애기 배고프다 먹여라" "배고파서 우는 거다"를 시전 하며 늘 배가 빵빵하게 음식을 먹이곤 했다.


아이가 놀라는 모습이 귀엽다며 신 과일을 손에 쥐어주고, 이유식이 조금 진행되자 된장찌개에 밥을 비벼주면 되지 않냐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먹는 음식을 탐내자, 나 몰래 조금 입에 넣어주기도 했으며, 조금 걷기 시작하자 "고추 앞에 요구르트 병 놔두면 오줌 싼다"며 잔소리했다.


반발심이 생겼다. "아이는 낳으면 다 알아서 큰다" "첫째 심심하니 둘째를 낳아야 한다"는 주변 어른들의 말이 지긋지긋해졌다. 그건 옛날의 일이다. 정말 우리 엄마가 자랐던 시절에는 그랬을 거다. 그때는 대가족 사회였고, 집에는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이모 등등 3대가 모여 살았다.


엄마가 아이를 낳아 놓고 밖에서 일을 해도, 집에는 이모들이 있고, 사촌 언니가 있고, 할머니가 있었으며, 골목에 나가면 같이 놀 친구가 있었다. 너네 집이 내 집 인양 오가면서 급할 때 아이를 봐줄 수 있는 이웃이 있었고, 그래서 정말로 아이가 저절로 자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한 개인이, 주 양육자인 엄마가 한 사람의 인생을 책임지는 시대. 잠시 쓰레기 버리러 갈 때도 아이를 맡아 줄 사람이 없는 핵가족. 엄마가 아빠도, 할머니도, 친구도, 동생도, 형도 되어주어야 하는 그런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쁘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그렇게 변해버렸다. 옛날 엄마들은 요즘 엄마들을 유별나다고 하고, 요즘 엄마들은 옛날 엄마들에게 무책임하다고 한다. 급변하는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양극화의 차이일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5살이 되자, 엄마가 했던 말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아이는 저절로 크는 게 맞다.


사실 내가 해줄 수 있는 부분은 많이 없다. 이제야 내 안에 갇혀서 너무 귀 닫고 눈 닫고 내 생각대로만 세상을 바라보려고 했던 점을 인정했다.


그때의 나는 왜 힘들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손 내밀지 못했나. 그냥 설렁설렁 사랑스러운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지 못했나. 꼭 왜 좋은 것만 주고, 좋은 엄마가 되려고만 노력했나. 그리고 왜 내가 부족한 엄마는 아닌지 고민했을까.


아이가 시판 과자 하나 먹는다고 해서 잘못될 것이 없다. 심지어 일 년에 몇 번 부산에 가서 몇 주 지내는 동안, 아이는 아무거나 잘 먹고, 아무거나 입에 집에 넣으면서 면역력이 쑥쑥 자랐다. 그리고 할머니와 이모들 ,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눈에 띄게 성장했다.


나만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자만심이었구나. 옛날 것은 무조건 맞지 않다고 생각했구나. 다시 또 나는, 이제는 친구처럼 변해버린 우리 엄마를 생각한다. 그리고 이젠, 좀 더 마음대로 자유롭게 키워봐야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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