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한 엄마 일기 3편] 산후조리원의 비밀
서로 가슴을 탁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있을까. 이건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진짜 가슴, 맨가슴을 말하는 거다.
산후조리원에 들어가면 맨 처음 보게 되는 진풍경이 모두 가슴을 내놓고 아이에게 수유를 하면서 거실 같은 공용 공간에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다.
같은 여자긴 하지만 목욕탕이 아니고서야 서로의 가슴을 볼 일이 없지 않나. 하지만 산후조리원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가능한 조금은 민망한 상황이 서로의 전우애(?)를 다지는 계기가 된다.
내가 선택한 조리원은 제주도에 위치한 소박한 곳이었다. 황토방으로 지어진 이층짜리 건물로 특별한 수업이 없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매일매일 반복되는 미역국에도 다양한 종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맛깔난 밥상이 차려졌다. 밥만 잘 나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천국 아니겠나.
사실 그 당시의 나는 고통받고 있었다. 나로 말할 거 같으면 병원에 도착해서 출산까지 첫아이임에도 불구하고 3시간 만에 뚝딱 낳았다. 게다가 절묘하게 무통주사 까지 맞아서 아픈 줄도 모르고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신은 공평하다고 하지 않은가. 찰나의 편함과 길고 긴 고통을 맞바꾸었으니, 출산 후의 회복은 말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고통 총량의 법칙이라고 하나. 낳을 때 쉬웠으니, 회복하긴 힘들어야 된단 말인가. 말하기 민망하지만 아랫부분이 처절하게 상처 난 관계로 앉지도 잘 걷지도 못하게 되었다.
거기에 출산 과정에서 평생 없던 치질도 생겨서 나는 거의 조리원에서 누워 지내다시피 했다. 다른 사람들은 벌써 회복해서 자유롭게 다니는 것 같은데, 왜 나만 이런가. 의사 선생님이랑 간호사들이 원망스럽고, 자연출산을 하고 싶었는데, 아이가 나오는 그 주에 스위스로 연수를 떠나버린 조산사도 원망스러웠으며, 하늘이 싫고 내가 싫고.. 정말 그때의 우울함은 사실, 둘째를 낳지 않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기도 한다.
아이는 분명 사랑스러웠으나, 그 이쁨을 알지 못할 만큼 내면(?)의 고통이 커서 '이렇게 평생 살아야 하면 어떡하나' 심히 우울한 나날들이었다. 나중에 물리치료를 받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출산 당시 꼬리뼈의 인대까지 늘어났단다.
평소 골반이 틀어져 있고 체구가 작은 탓에 아마 몸이 무리했으리라. 다행히 아이는 조리원 내내 우는 소리도 못 듣겠다는 주변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으면서 자다 먹다를 반복하며 몸무게를 키워가고 있었다. 하지만 조리원을 나오는 그날부터 생떼가 시작되었다는 건 거짓말 같은 진실이다.
하지만 옛날 사람들의 말이 다 맞다. 아이를 키우면서 더 그런 생각을 하지만 옛 조상들의 말은 늘 옳다. 아이 낳으면서 생긴 병은 다 사라진다고 하지 않나. 그 상처들은 생생한 기억으로 존재하긴 하지만, 완전히 사라졌다.
결혼을 하면, 아이는 언제 낳아? 아이를 낳으면 둘째는 언제 낳아? 둘째를 낳으면 딸 둘이면 아들은 있어야지. 아들 둘이면 딸은 있어야지. 세명 이상 낳으면 요즘 세상에...라는 눈으로 바라보는 오지라퍼들 조용하시길. 알아서 하겠습니다. 나는 아직도 다음 아이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전혀.
초보 엄마가 아무도 없는 제주 땅에서 늘 바쁜 신랑을 옆에 두고 홀로 아이를 키우기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하루 종일 귀신 산발이 돼서 '우유-기저귀 갈기-재우기' 사이클을 돌다 보니, 말로는 이쁘다고 하지만, 정말 아이가 이쁜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이를 처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인 날을 기억한다. 그날은 처음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도, 출산을 했던 날도 아니었다. 그냥 수많은 날들 중의 하루, 평범하게 소파 위에서 아이를 안고 있을 때 찾아왔다. 아이의 깊은 내면의 눈이 내 눈과 마주쳤다. 그리고, 웃었다.
그 반짝하는 순간이 내 마음에 박혀 행복감이 잉크처럼 퍼져나가던 순간을 기억한다. 찰랑~ 찰랑~ 찰랑. 그 순간을 생각하면 아직도 그때의 파장이 잔잔히 전해져 온다.
낳은 정보다 키운 정이 크다는 말이 실감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낳고 내가 키웠으나, 나와 너의 첫 만남은 그렇게 사소한 순간에 일어나 버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