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보다 길게 느껴진 일주일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내고 저녁 늦게 들어와 TV채널을 돌리다, 마이크 앞에 선 그의 모습이 보였다.
이번에는 또 무슨 소릴 하려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채널을 돌리려던 찰나, 그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말이 쏟아져 나왔다.
‘도대체 내가 뭘 들은 거지?’ 싶었고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이어진 뉴스 속보에서는 실시간 국회 상황이 생중계되었고, 혹시 계엄령 아래 살게 된다면 내 삶과 이 나라는 어떤 모습일지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책과 영상으로만 접했던 국가폭력과 인권의 억압, 군부독재와 영장 없는 체포 및 구금, 언론과 집회, 결사의 자유가 모두 없어지는 삶-
내가 하는 모든 이야기가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 되는 시대, 마치 조지 오웰의 1984에서 텔레스크린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모두가 그러했듯 나 역시 두렵고 떨리는,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TV 화면에 집중했다. 국회의장이 계엄해제 결의안을 발표하고 투표 결과가 나오기까지, 헬기가 국회 운동장에 착륙하는 모습, 국회 앞에서 벌어졌던 시민들과 보좌진, 계엄군의 대치, 담을 넘는 국회의원들의 모습까지.
내 인생에서 아마 가장 강렬했던 기억 중 하나로 남지 않을까 싶다.
사실 난 정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그렇게 큰 관심도 없었다. 정치인은 어느 쪽이든 모두 크게 기대할 만하지 못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일은, 정치적 성향을 떠나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초유의 사태였고, 국민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총칼을 겨누는 일이었다.
불법적인 방식으로 정치적 정적들을 제거하려 했고, 아직은 의혹이지만 장기독재 집권을 꿈꿨을지도 모를 일이다.
2024.12.3 밤은, 내게 2017.3.20 저녁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나의 영년(year zero). 모든 것이 무너졌고, 나의 세계가 통째로 흔들렸으며, 더 이상 그 전과는 같을 수 없으리라.
2017년 3월 20일. 주요 언론사에도 연일 보도될 만큼 큰 사회적 물의와 파장을 가져온 대형교회 세습.
그 세습을 정당화하기 위한 청빙결의안, 편법적 투표가 진행된 날이었다. 투표는 비밀이 보장되지 않은 채 누가 찬성/반대표를 던지는지 옆사람이 모두 볼 수 있었고, 반대가 예상되는 청년/대학생 젊은이들은 투표 장소에 많이 들어오지 못하게 제한했다. 반대를 말하는 사람들은 발언권을 박탈당하거나 끌려 나갔고, 나는 앉은자리에 붙박이처럼 몸이 굳은 채 분노에 손이 떨렸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불의에 “네”라고 외치던 그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때의 소름 끼치던 그 생생한 느낌을.
내가 아는 주변 사람들은, 내가 느끼기엔 대부분 성실하고 착한, 평범한 이들이었고 신앙심도 깊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들에게 결정적 잘못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 생각하고, 질문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사유의 부재, 회의의 부재. 우리 모두는 누구나 언제든 아이히만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저 평범한 일상이 이어지는 호시절에는, 그런 잠재성이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모두 누군가의 좋은 친구, 동료, 가족, 선배, 후배 등으로 한데 섞여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결정적 사건은 각자의 신념과 가치관을 드러낼 수밖에 없게 만들고, 어제의 친구이자 사랑하고 믿고 따르던 사람들과 등을 돌리고 적이 되게 만드는 비극을 가져온다.
이미 이번 계엄령으로 인간관계를 정리했다는 지인들의 글이 온라인상에서 종종 눈에 띈다. 나 역시 경험했던 일이고, 이해되기도 하면서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분열되고, 서로 다투며, 각자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밖에 없다.
계엄령과 관련된 이들이 조사 과정이나 소위 양심고백을 하는 과정에서 “몰랐다”라고 말한다. 10여 년 전 예능 <진짜 사나이>에도 나왔다는 계엄사령관은 말간 얼굴을 하고 몰랐다고 했다. 민주당의 부승찬 의원은 그의 잘못을 지적하면서도 안타까워하며 그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정말 몰랐던 것일지 앞으로 더 조사가 진행되어야겠지만, 전역을 한 달 앞두고 있었다는 그가 타의에 의해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라면 인간적인 안타까움이 든다. 그러나 그럼에도, “몰랐다”는 것은 변명이 될 수 없다.
707 특수임무부대 김현태 단장 역시 국회 진입 지시가 자신의 책임이었다며 군복을 벗겠다고 했다. 부하들이 너무 괴로워하고 있다며 자신은 못난 지휘관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계엄의 내용 중 국회 진입이 불법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몰랐다”라고 했다. 이 역시 진위 여부를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몰랐다”는 사실이 죄가 되는지, 우리는 혼란스러워할 때가 많다.
태평성대에는 사실 이런 것이 중요하지 않다.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일상을 누리면 그뿐이다. 도덕적, 철학적, 윤리적 회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아니, 중요하지 않은 듯 느껴진다.
하지만 삶과 역사 속에서 벌어지는 결정적 사건들은우리를 평화의 시대에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질문하라고 한다. 회의하고, 반문하라고 말이다.
7년 전 그날, 집단으로부터의 배제와 유무형의 폭력을 각오하고 반대한 사람들이 있었고, 모두가 “네”라고 할 때 소신 있게 “아니오“를 외친 이들이 있었다. 그 덕분에 나처럼 겁 많고 소심한 사람도 “아니오”를 외칠 수 있었다.
더 이상 공동체라 부를 수 없는 그곳을 나왔고, 혼자가 되었다. 하지만 곳곳에서 함께 싸우는 이들을 만났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실제로는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지만, 나는 더 많은, 더 넓은 세상과 연결되었다.
지난 토요일, 인생에서 처음으로 집회에 참여했다. 정치에 무관심했던, 무관심하려 했던 내 모습에 대한 속죄이자, 7년 전 있는 힘껏 “아니오“를 외쳤던 내 안의 분노와 울분이 다시 나를 국회 앞으로 향하게 했다.
누군가에게 함께 가자고 물어보는 것 자체가 부담이거나 관계를 어렵게 하는 일이 될까 봐, 혼자 다녀왔다. 7년 전 일을 겪으며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목소리를 내면서 많은 이들과 멀어졌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이제는 그때보다 조금 더 부드럽고 유연하게 대처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아니, 그냥 사실 더 이상 누군가와 부딪치고 싶지 않은 것뿐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렇게 향한 여의도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평화롭고 질서 있게 집회에 참여하고 있었다.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물과 핫팩, 간식거릴 사러 들어간 지하철 역 편의점에서 나처럼 잔뜩 껴입고 비슷한 물품을 사는 이들을 보며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지하철역과 길거리를 가득 메운 이들에게서 희망을 보았다.
탄핵안이 부결되고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서둘러 집으로 향하는 길, 자리를 떠나지 않고 투표를 거부한 이들에게 투표하라며 외치는 사람들, 국민의 힘 당사 앞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을 뉴스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또 하나의 아하 모먼트, 눈이 열리는 (eye-opening) 경험이었다. ‘아, 저런 방식도 있구나.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구나.’하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7년 전 그날 이후, 많이 외롭고 힘들었다. 누군가는 내게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라고 했고, 또 많은 이들이 아직도 여전히 그곳에 있다.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고, 문제(그들에겐 문제가 아닐 것이다)도 해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수 있을까. 부디 그럴 수 있기를. 많은 국민들의 열망과 행동이 변화를 가져올 수 있기를. 또, 이런 노력이 내가 그러했듯 아직은 소시민적 일상에만 몸을 맡기려는, 생각하거나 질문하지 않는 이들에게도 변화를 가져올 수 있기를. 다른 동료인간, 동료시민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 우리에게서 사라지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