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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ping Hands Sep 22. 2021

영화 리뷰 - 이창동 감독의 '버닝'

우리 시대 아담의 원죄에 관한 이야기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


비행기 안에서 시간을 보낼 요량으로 생각 없이 봤던 이 영화가, 그 후 몇 년 동안이나 뇌리에 강렬하게 남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봐야지 했던 마음이 무색하게도, 왠지 모를 깊은 여운과 혼란스러움, 다소간의 충격, 혼돈 같은 복잡한 마음이 오래도록 잔향으로 남았다.


영화가 주는 메시지가 잘 이해되지 않아, 얼마 전까지도 늘 뭔가 알쏭달쏭하면서도 찜찜한, 그런데 쉽게 잊히지는 않는 영화로 각인되었다. 그러다 최근 영화 소개 프로그램과 한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이 영화의 의미를 다시 한번 곱씹어보게 되었다.




영화 속 유아인이 스티븐 연에게 그토록 처참하고 과격하게, 광기와 분노가 뒤섞인 것 같은 칼부림을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방법밖에는 없었던 걸까.


유순하고 순박해 보이던 영화 속 그의 모습과 마지막 장면 사이의 괴리감이 너무 커서, 나에겐 그것이 꽤 큰 충격과 혼란을 준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를 그토록 분노하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진흙이 잔뜩 묻은 덤프트럭을 몰고, 소똥 가득한 축사를 청소하며, 니전투구하듯 진흙탕 같은 현실을 하루하루 버티고, 살아가는 그. 그런 그가 지켜주고 싶었던 사람. 친구라 생각했고, 조금은 사랑했을지도 모를 그녀.


나에겐 소중한 그 무엇을, 나에겐 너무나 진지하고 치열한 삶을, 사람을, 사랑을 매끈한 포르셰를 몰며, 뚜렷한 직업도 없이, 고급 빌라에서 호화로운 삶을 즐기며 아무 흥미 없다는 듯, 잠시간의 지루함의 날려줄 유희 거리인 양 바라보던 낯선 이방인의 시선.


평생을 이곳에 발붙이며 살아온 나였지만, 나에게는 한 번도 주어지지 않았던 삶의 모양,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 알지 못했기에 꿈조차 꿀 수 없었던 세상. 나는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닿을 수 없는 그곳에, 아무런 노력도 자발적 성취도 없이 귀속된 지위처럼 너무도 편안하고 따분한 모습으로 앉아있던 그.


내가 사랑하고 동경했던, 그러나 나에겐 맞지 않다고 여겼기에 양보했던 그 사람조차, 너무나 가벼운 전리품처럼, 수많은 컬렉션의 하나로 여겨버린 그. 그것이 그를 그토록 분노하게 했던 그의 죄과였는지 모른다.


우리 시대 평범한 젊은이에게 박탈감과 상실감을 준 죄.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함부로 대하고, 나의 세계와 가치를 흔들어버린 죄. 그는 그것을 단죄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다.


신기루 같은, 현실감 없어 보이는 이 영화의 스토리가 과연 비현실적인 것인가. 꽤나 영화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하다가, 얼마 전 한 예능을 보며 꼭 그렇지만은 않을 수 있겠단 생각을 했다.




잘 나가는 외국인 연예인의 교포 출신 친구. 방송이라는 특성도 있었겠지만 직업도, 수입원도 뚜렷하게 밝히지 않은 채 럭셔리한 라이프 스타일을 보여주던 그녀의 모습. 방송국에서 높은 시청률을 위해 더 극적으로 연출했을지 모를 일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 장면을 시청할 많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닿을 수 없는 현실 같은 모습들.


우리는 그것이 내 것이 될 수 없을 거라는 슬픈 예감, 혹은 확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고, 열망하고, 꿈꾸고, 그러다 이내 날개를 잃은 채 나락으로 떨어지는 새처럼 좌절하며 슬퍼하고, 비탄에 잠긴다.


평생을 살아온 이 공간, 이 도시, 이 나라에서 나는 누려보지 못한 것들을 심심풀이 땅콩처럼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즐기는 그들의 모습.




그런 모습은 사실 멀리 있지 않다. 손가락 한 번의 터치로 SNS만 들어가면 그 세계를 엿볼 수 있다. 단, 그곳에 나를 위한 좌석은 없다. 나는 줄곧 입석이다. 예전엔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세상, 또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알아버린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진 아담과 이브가 되어, 나의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이전엔 미처 몰랐던 나의 ‘벌거벗음’을 자각하게 된 것.


그것이 우리의 원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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