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지도 않고 감히 북리뷰를 쓰는 불경스러움을 샌델에게 사죄하며-
<교양 있는 사람이라면 응당 읽어야 할 것 같은 베스트셀러, 인기 도서들>
마이클 샌델의 책 ‘공정하다는 착각’
얼마 전 이 책이 한창 주목받으며, 어느 정도 교양 있고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읽어야 할 필독도서처럼 여겨지고 있다(아님 말고…).
교양과 열정이 부족한 나는 아직 이 책을 읽진 않았고, 얼마 전부터 구독을 시작한 조승연 작가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이 책의 리뷰를 접해 개략적인 내용을 알고 있는 상태다.
늘 당연하다 생각했던 통념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 그것이 이 책의 강점이라고 조승연 작가는 그러더라. 그리고 미국과 한국, 유럽의 상황이 다른 만큼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적용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여전히 생각해볼 주제를 던져주는 책이라고. 리뷰를 보며 나도 한번 읽어봐야겠단 생각을 했다.
<읽지 않고 감히 북리뷰를 쓰게 된 경위에 대하여>
그런데 마침 얼마 전 방송에서 이 책을 다루며, 저자와의 화상 미팅을 통해 능력주의가 가진 한계, 그것이 젊은 세대 및 사회 전반에 불러오는 부작용을 더 자세히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많은 일반인들에게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하고, 방송이라는 대중적 매체를 통해 접근 루트를 열어준다는 점에서는 이런 교양 예능 프로그램들이 의미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런 류의 프로그램들을 볼 때면 늘 드는 아쉬움과 불편함은, 동등한 토론자라기보다는 선생과 학생같이 역할이 세팅되는 출연자(강연자)와 패널들의 관계다.
물론 전문가를 모셔놓고 듣는 강연이고, 일반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으려면 그런 구도가 더 효과적일지 모르겠지만, 해당 주제에 대해 다 같이 생각하고 논의해보자고 하면서도 막상 패널들은 “으응 그렇구나~”하고 강연자의 해설에 끄덕이거나, 심화 질문을 하더라도 강연자가 주장하는 관점의 연장선상에서 이야기가 더 진행될 수 있도록 촉매제 같은 기능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가 삐딱한 건지 모르겠지만(네 맞아요), 저자의 생각에 분명 의문이 가거나 100%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었는데 말이다.
교육이 중심이 되는 능력주의 사회를 살며, 개인의 노력과 실력만이 아닌 외부적 요인(부모의 사회경제적 수준, 사교육 가능 여부, 문화적 혜택 등)이 많이 작용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력과 노력이라는 것도 분명 어느 정도 능력주의 사회의 피라미드 정점에 오르는 데 기여한다.
<내 지난 과외 제자들에게 바치는 고해성사>
내 경험을 예로 들자면, 대학시절 과외했던 학생들 대부분은 유복한 형편에, 사교육에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할 수 있는 집안의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그 부모들의 노력, 그리고 선생인 나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그 아이들은 공부에 특별한 관심도, 자질도 없었고, 노력도 실력도 갖추지 못했다(얘들아 미안 ㅎㅎ).
그 아이들을 보며 아, 부모님들이 아무리 많은 투자를 한다 해도 모두가 다 공부를 잘할 수는 없는 거구나 싶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런 투자와 본인 딴에는 노력한다고 하는데 성적이 오르지 않는 경우였다. 그러면서 나는 이 아이가 공부 말고 다른 뭐라도, 자기가 좋아하고 잘하는 걸 찾아서 열심히 할 수 있도록 관심 분야를 먼저 찾고 그걸 서포트해주는 게 맞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밥벌이를 위해 계속 과외를 이어갔지만…(얘들아 또 한 번 미안 ㅎㅎ)
<실력과 노력은 정말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하는가>
어쨌거나. 그런 특권적 환경이 주어지더라도 모두가 다 좋은 성취를 내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그런 특권이 불평등에 기여할 수 있음을 인정하더라도, 그런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들의 노력과 실력도 어느 정도 작용했음은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간과된 영역의 학생들이 있는데, 그건 하위 소득층에 속한 학생들 중 명문대에 진학한 학생들 역시 그들의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 실력이 뒷받침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그들의 환경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외부적 요인들을 제공하기 위해 그들의 부모들의 헌신적 노력이나 사회적 안전망 같은 제3의 요소가 개입되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경우 역시 그들의 노력과 실력 역시 일정 정도 그들의 성취에 기여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싶었고.(실력과 노력이라는 부분이 지나치게 폄하 또는 지양되는 면이 있는 것 같다는 점).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의 그간의 세월과 노력이 부정당하는 거 같아서 불편했던 건지도 모른다. 학창 시절, 공부하는 것이 불행하거나 억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가라면 절대. 그때처럼 열심히 할 자신이 없다. 진짜 ‘개’열심히 살았던 나의 십 대와 이십 대. 근데 그런 노력으로 이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내 것이 아니었다니. 아, 배알이 꼴린다. (bgm: 이게 진짜일 리 없어.)
<그렇다면 대안은?>
또 다른 하나는, 그렇다면 그는 능력주의가 아닌 다른 어떤 대안적 패러다임을 생각하고 있는지, 그리고 더 궁극적으로는 어떤 새로운 패러다임을 통해서라도 계층 간의 차별이 과연 이 지구 상에서 사라질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능력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기준은 무엇이 있을까. 그는 혹시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로의 회귀를 꿈꾸고 있는 것인가. 내 지식이 짧아서 이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정치적 성향이 어느 쪽일까 생각하며 잠시 음모론적 망상에 빠진 나의 편집증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또 다른 대안 정도라면… 독일에서의 마이스터 시스템 정도가 떠올랐다. 요즘 독일의 상황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모두가 대학을 가지 않아도, 기술 숙련도와 경력으로 교육 수준에 따른 심각한 보상의 격차를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시스템이 우리 사회에도 자리 잡을 수 있다면 그것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또 다른 대안은… 북유럽식 (사회주의) 복지국가? 많은 세금을 내는 대신, 그만큼 사회 안전망 속에서 어느 정도 삶의 질을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
독일식이든, 북유럽식이든. 나의 짧은 식견으론 두 케이스에서 발생하는 음과 양에 대해 다 알지 못하므로 무엇이 좋다, 혹은 반드시 그것이 좋다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이 부분에 대해 더 자세히 아는 분들이 의견을 공유해주시면 좋겠다. 나도 공부를 해야 할 테고…)
<계층 차이의 완전한 극복,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고 싶은 소망>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남은 의문은.
사회에서의 계층적 차이를 완전히 극복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샌델은 완전한 극복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심화되는 계층 간 격차를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경각심을 주고 싶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그 생각에는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사회주의 혁명 이후에도, 그리고 전 세계의 수많은 혁명 혹은 쿠데타를 통해서도. 전복된 계층구조 속에서 피지배계층 혹은 주변부에 속하던 사람들이 새로운 지배계층으로 군림하는 것을 이미 우리는 역사를 통해 지켜봤다. 계층의 피라미드 구조는 쉽사리 무너지거나 바뀌지 않는다. 다만, 각 층을 구성하는 사람들이 시대와 상황에 따라 교체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삼각형이 다이아몬드형 혹은 보다 균형적인 형태로 변형되도록 계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능력주의가 학생들과 부모들, 그리고 패자뿐 아니라 승자에게까지도 모두 불안과 상처를 가져올 수 있다는 그의 지적에는 매우 공감한다. 어쩌면 그것은 누구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치킨게임 혹은 결국엔 모두가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제로섬 게임인지도 모른다.(10을 얻은 승자 역시도 언제 0으로 전락할지 모르는 위태로운 생태계 환경에 처해 있으므로, 승자도 궁극적으로는 언제 패자가 될지 모른다.)
<Infinite Game으로의 전환>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성취에 의해 평가받고, 가치를 부여받는 조건적 사랑을 받아왔다. 그래서 언제나 더 이루기 위해 아등바등하고, 쉬고 싶어도 쉴 수 없다. 우리는 두 눈을 가린 채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경주마로 길러졌다.
그래서. 바라기는, 모두가 ‘교육’, 주로 ‘공부’로 국한되는 그 한 가지 영역에서 유한 경쟁을 하는 finite game 시스템을 벗어나, 각자 관심이 있고 좋아하는 분야를 찾아서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남과의 경쟁이 아닌 나만의 세계를 구축해가는 infinite game(나 자신과의 싸움, 나를 뛰어넘는 것이 목표인 게임)으로 바뀌어 갈 수 있다면 좋겠다.
단순히 누군가를 이기기 위한 전략은, 제한적이고 유한할 수밖에 없다. 누구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모색할 때, 그 전략은 무한한 독창성과 다양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어떤 분야에서든 보상이 주어지는, 정당한 보상을 기대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그런 사회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결론은… 나라는 인간의 모순에 대한 자아성찰로 마무리>
어쨌든…
새로운 생각과 토론들은 언제나 즐겁고 반갑다.
다만, 그것을 습득하는 과정에서조차 우리는 여전히 샌델이 경계하는 엘리트주의적 방식으로, 누군가가 설명해주고 떠먹여 줘야 하는 순진하고 무지한 다수의 대중으로 한 명의 엘리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 조승연 작가와 TV 프로그램의 강연자에 기대서 샌델의 지식에 기생했네…(착즙일지도…)